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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May 05. 2024

인생 서막

모든 일이 그저 그렇게 지나갈 뿐..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가려고 하였으나, 집안의 파산으로 야반도주를 해야 했다. 송림4동 8번지 염전가 판잣집에 숨어 살면서 방황을 하게 되었다. 동인천역 주변을 맴돌며 좋은 친구, 나쁜 친구 가리지 않고 사귀며 허송시간을 보냈다. 그저 먹을 수 있고 잘 곳이 있고, 술이나 담배도 남에게 신세 지며 모든 일이 그저 그렇게 지나갈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동인천역 벽보에 중앙일보 인천지사 총무직 모집 공고를 보았다. 당시 동인천역 대한서림옆 건물 2층에 있었다. 총무는 배달원(주로 학생)과 함께 상업광고지(찌라시)를 신문에 삽입하여 지역별 신문 배송 부수를 나누고, 배달 학생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배달원이 안 나오면 직접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배달도 해야 했다. 아울러 신문대금 수금과 확장(구독자 늘리는 일)도 총무가 하는 일이었다.


당시 총무를 관리하는 책임자분도 같은 성을 가진 양 부장 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주신 것 같다. 그러나 배달원을 감독하고 관리하고 확장, 수급하는 것도 괜찮았지만 배달원이 안 나오면 직접 신문을 돌리는 것이 너무 창피했다. 그러나 배달하는 고학생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참을 수 있었다. 월급은 2만 원 정도였다. 그 당시 제일 고급이라는 (다방에서도 아는 단골에게만 주었음) 청자 담배를 피우는 호강도 누렸다.


신문사 총무는 신분증으로 기차를 무상으로 타고 다닐 수 있어 좋았다. 인천주재 기자가 같이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부모님과 같이 황해도 연백에서 피난 오신 분이 경영하는 정미소가 있는 소사로 이사 가게 되었다. 정미소 구석부지에 판잣집을 지어 살며, 낮에는 정미소에서 가대기(쌀가마니를 나르는 일) 일을 하며, 밤에는 경비생활도 했다. 몸이 허약하여 가대기 일을 하다가 쓰러지면 아버지가 대신해 주곤 하셨다. 어머니는 정미소에서 주는 쌀을 아껴 모아서 새벽 나절에 나와 같이 기차를 타고 동인천역 배다리 쪽 시장 한 구석에 앉아 쌀을 팔아 집안 돈을 마련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고 어머니를 따라다니기만 했던 나 자신이 너무 슬프다. 죄송하다. 이렇게 어렵게 생활해야만 했던 아버님, 어머님이 그립다. 지금 같으면 내가 무슨 일이든 찾아 하면서 부모님들을 모시고 동생들도 모두 제대로 돌보며 살았을 것이다. 주변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 것 같았다. 가족들에게 지금도 미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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