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학 1995년 여름호에 실린 한강 작가의 단편소설
신국판 74페이지 분량의 중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이다. 문지 [여수의 사랑]에 실린 단편집 두 번째 소설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강 작가의 소설이 밝지 않은 느낌인데, 소설의 제목 또한 어둠이 들어간다. 다 읽은 소감은 역시나 한 없이 어둡다.
주인공 영진과 반주인공 명환이 주로 나온다.
첫 단락은 역시나 아주 욕지기가 나오는 현실적인 묘사로 시작된다. 심각한 무더위 속 퇴근길. 명환은 주인공 영진의 퇴근을 기다리며 경비실 모서리에 며칠간 매일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명환이 보이지 않았다. 명환은 앞 동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영진을 매일 감시하고 있었다.
영진은 명환을 알게 된 과거를 회상한다. 영진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는 인숙언니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인숙언니는 어두운 현실에 시달리며 고된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언니다. 그 언니가 어느 날 전세금을 혼자 빼서 사라졌다.
영진은 급하게 서울에 사는 이모에게 한 달만 신세를 지고자 부탁한다. 그녀는 그렇게 눈치 받는 삶을 시작한다.
-. 몇 번의 어색한 저녁 식사 후 나는 일찍 퇴근하지 않았다. 이모부도, 세 사촌 동생도 나를 향해 미묘한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이제 중학교 삼 학년에 올라가는 사내아이가 쏘아 보내는 멸시의 눈빛이었다. 저녁 여덟 시 넘어까지 일을 해주고 가는 파출부 아주머니만은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동정심이 드러나 보이는 아주머니의 친절은 오히려 내 약한 마음을 들쑤셔놓곤 했다.
영진은 그렇게 눈치를 받다가 이모의 제안으로 베란다에서 살기 시작한다.
-. 거기를 네 방으로 하는 게 어떻겠니? 예전에 거실을 넓힐 생각으로 거기에도 비닐 장판을 깔아놨어. 좀 춥긴 하겠지만, 담요를 깔고 창문을 닫으면 그런대로 괜찮을 거다. 뭐 하면 잠은 이불 갖고 소파에서 자도록 하고.. 독방이니까 너 지내기에도 좋지 않겠니?
영진은 본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낭떠러지에 매달린 것 같은 삶이 시작된다. 그래도 눈칫밥을 끝이 없다. 화장실 사용도 눈치 보이고, 식사도 눈치 보여서 일부러 빵으로 끼니를 채우고 집에 늦게 귀가한다. 명환을 알게 된 건 그런 시간을 한 달 정도 보낸 뒤다. 영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베란다 생활의 시간을 정리하며 안나 카레리나, 뒹구는 영문판 시집 등을 읽는다.
-. 너는 음지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네 씨앗을 햇빛 속으로 나를 것이니, 너는 그 햇빛 속에서 다시 아름답게 살게 될 것이다. (K. Gibran, “Of the Martys to Man’s Law”.)
명환은 대뜸 영진에게 말을 걸며 물었었다.
-. 집이 필요하지 않소? 집이 필요할 것 같아서 묻는 거요.
어떤 사내가 길 건너에서 영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앞 동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동네 아주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교통사고가 있었고, 젊은 부부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임신 중이던 여인이 죽었고, 남자는 다리를 하나 잃어서 직장도 관두게 되었다. 그 남자가 명환이라는 것이다.
명환은 가해자 가족에게 충분한 사과의 의미가 되는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명환은 그 가해자 가족의 곁에서 그들을 계속 지켜본다. 심지어 가해자 집에 가서 차 대접을 요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가해자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와 같은 동의 아파트를 구매한다.
-. 당신들 옆에서 살고 싶었소. 그게 이유의 전부요. 그런데 당신들을 끔찍하게도 잘 살고 있군, 아주 잘들 살고 있어..!
명환의 말에서 처절함이 느껴진다. 안타까운 것은 가해자 가족이 평소에 착하게 살던 것이었다. 그렇지 안하도 그들은 한 번의 실수가 한 가족을 파멸했다는 것에 미안함과 죄책감을 갖고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명환이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 사내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냉랭했다. 젊은 부부는 사죄와 위로의 말을 간신히 내뱉은 뒤 사 가지고 간 과일과 고기, 그리고 얼마간의 자기앞수표가 든 봉투를 슬며시 내려놓고 현관을 나섰다. 그들이 승강기에 오르려는 찰나, 사내의 방에서 무시무시한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팔과 한 다리로 기어 나와 사과 궤짝을 힘껏 현관 밖으로 밀어낸 사내는 돈 봉투와 비닐에 싼 쇠고기를 복도에 내팽개쳤다. 빳빳한 수표들이 공중에 날렸다. 잘 저미어진 핏빛 살코기들이 복도에 질펀하게 흩어졌다.
그 명환이 영진을 갑자기 부르더니 본인의 집을 그냥 준다고 한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명환은 앞동에서 어둠 속을 견디고 있는 영진을 지켜봤다는 것이다. 그런 영진의 사정을 알고 집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집을 준다고 한다. 조건도 없다. 명환은 거절하는 영진을 끈질기게 기다려서 집을 준다고 계속 막무가내로 명령하듯이 말한다.
우연히 마주친 인숙언니. 암에 걸렸다고 한다. 인숙언니도 명환도 그들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 그 안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영진.
-. 푸른 신호가 켜졌다. 네 박자의 날카로운 신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복사열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를 성큼성큼 밟아가는 내 눈앞에 흐물거리는 어둠이 무너져 내렸다. 그 어둠 위로 수천수만의 불빛들이 일제히 점화되었다. 그것들은 마른 톱밥을 사른 불티들처럼 지상의 어둠을 에워싸고 너울대다가 이윽고 먹빛 허공 속으로 손짓하며 스러져갔다. 어디선가 목청껏 고함치는 소리, 합창 소리, 폭죽처럼 터지는 휘파람 소리들이 아득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소설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세상 속의 작은 빛들을 보여주며 페이드 아웃 되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작가는 결국 그 작은 빛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영진은 그저 그 작은 빛 중의 하나가 되어 살아갈지, 어둠에서 살아갈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 대부분 그런 어둠의 공간을 채우며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먹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