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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조각글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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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Sep 07. 2023

글이 써지지 않는 밤

an Illiterate Night

좋은 밤입니다. 밤은 감성을 잡아다가 글로 내내 기억하기 좋은 시간이에요. 펜을 들고 종이를 꺼내서 무어라도 쓰고 싶어서 끄적이기 시작했어요. 언젠가 제게 글은 어떻게 쓰는 거냐고 물어보셨죠? 왜 제게 그런 물음을 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그냥 쓰세요. 뭐라도 쓰다 보면 건질만한 단어와 문장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기록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핏속에 분명 쓰는 유전자가 있을 거예요. 지금도 필사책이나 쓰기 책을 서점에서 쉽게 만날 수 있었거든요.


글이 써지지 않는 밤이 오면, 보통 저는 맥주를 깝니다. 술이 약한 사람이라서 조금만 마셔도 취하거든요. 도수가 낮은 술을 더 희석해서 마시기 위해서, 하이볼이나 양주 마시듯 얼음을 가득 채운 유리잔에 맥주를 채워 마시곤 합니다. 술을 마시면 미친 과학자처럼 글을 적곤 했어요. 부끄러움도 수치도 모르기 때문에 정말 신박한 글을 쓸 수 있어요. 그리고 다음날 정신 차린 체면과 명예가 글을 다시 보고 지워나갔죠. 술을 마시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이야기를 썼어요. 불경한 글도 많이 썼어요. 그래도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다 욕보였어요. 저는 천국이나 극락이나 발할라는 갈 수 없단 말이죠. 머리는 아프고 손은 거르는 것 없이 그대로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적고. 날것의 글들이 많아요. 자극적인 이야기를 많이 쓴 것 같아요. 일부는 이게 뭐라고 쓴 건 지 모르겠는 글자들도 많아서, 해석과 해독을 기다리는 원고가 서랍 속에 그대로 있어요.


그다음에는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나는 차를 꽤 좋아하는데, 이건 만화의 영향을 받았어요. 18세기 영국이 배경인 어떤 만화였는데, 주인공들이 매번 티타임을 갖지 않겠어요? 그때부터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어요. 영국 귀족처럼 정통을 따라 마셔본 적 있어요. 오렌지 페코니 랍상소우총이니 얼그레이니 아쌈이니 하는 홍차 이름을 이때부터 알고 구분하게 됐죠. 차마다 최상의 맛을 즐기는 방법이 다 다른데, 그걸 고려해서 찻잎의 양과 물의 온도, 다기를 제대로 맞춰서 차를 마실 땐 행복해요. 그리고 티타임을 즐긴 뒤에 뒤처리를 생각하면 끔찍해요. 귀족이 왜 귀족이겠어요. 시간 맞춰서 적당한 온도로 티포트도 데우고 잎차가 잘 우러나도록 시간 맞춰 물에서 잎차를 빼내고 어울리는 본차이나 찻잔을 준비해 주는 메이드가 있잖아요. 나도 메이드가 있다면 매일매일 티타임을 즐겼을걸요.

그래서 버려야 할 잎차들이 쌓였어요. 그다음에는 티백을 사 먹기 시작했어요. 그냥 머그컵에 티백을 걸고 뜨거운 물을 붓기만 하면 되거든요. 컵라면과 다를 바 없어요. 200ml, 300ml 등 추천하는 용량이 있지만, 과감하게 무시하고 컵에 꽉 차게 뜨거운 물을 부어요. 머그컵은 기왕이면 하얀 게 좋아요. 물에 홍차가 우러나는 걸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거든요. 우러나는 게 맞지만 머그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홍차가 퍼지는 것 같아요. 향을 피우면 연기가 방에 불규칙적인 곡선을 만들면서 퍼지잖아요. 홍차는 그렇게 물에 퍼져요.

술 마시고 사람을 죽였다면, 차를 마실 땐 어떤 사랑이나 이별을 주로 해요. 아무래도 말짱한 정신으로 '사람을 죽였어요'같은 글을 쓸 수는 없잖아요. '자연사 박물관'이나 '봉지 속 물고기'는 홍차를 마시면서 만났죠.


차를 마시면서 쓴 글도, 어쨌든 밤에 쓴 글이라 과도하게 감성이 들어갈 때가 많아요. 술을 마시고 쓴 글도, 차를 마시고 쓴 글도 대낮에 수정작업을 거쳐요. 주로 커피를 마시면서 글을 씁니다. 항상 카페에서 '아메리카노가 아닌 것'을 팔아주길 기다리고 있어요. 주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는데, 한여름에는 그보다 더 차갑고 빨리 즐길 수 있는 콜드브루를 시켜요. 커피는 주로 레포트를 쓰거나 기사를 쓰거나 계획서를 쓸 때 많이 마셨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면 습관적으로 비판적 글쓰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람 많은 카페'도 커피 마시면서 썼어요. 이건 사실 과제로 제출했던 글이거든요.


그다음에는 산책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마냥 걷다 보면 좋은 글들이 걸릴 때가 많았어요. 그럼 걸음을 멈추고 메모장에 막 적는 거죠.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문단이 되고, 너무 긴 문장은 나눠서 쓰기 위해 노력하고. 필연적으로 사람은 세상에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어요. 나는 그게 하필 글이라 조금은 서럽기도 했어요. 흔적을 남기면 뭐해요. 사람들이 안 읽거든요. 같은 얘기 반복해도 뭔 얘기하는지 모를걸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나는 글을 사랑하는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하나나 단어 하나쯤이 누군가의 머릿속에 떠돌기를 바라나.


어쩌면 우린 모두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딘가에 쫓겨 살고, 무언가 쫓으며 살기 때문에, 그래서 글을 쓰고 싶은 거예요. 글을 쓰려면 아무튼 생각하게 되잖아요. 나에 대해 쓰고, 누군가에 대해 쓰고, 감정을 담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자주 쓰는 단어 등.. 맨날 달리고 뛰기만 했던 나를 오롯이 만날 수 있어요.


봐요, 글이 써지지 않는 밤에 벌써 이렇게 많이 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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