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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와 보낸 청춘과의 재회가 준 것

- 도쿄여행 2307 (6)

by 선홍


무더위에 덕질하느라 무리한 딸은 결국 몸살이 나고 말았다.

그 덕에 꼭 가보고 싶었던 일정을 하나 포기해야 했는데,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이었다.


외국 여행 갈 때 좋아하는 작가와 관련된 장소를 가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는데.

아무리 여유가 없어도 독일에 가면 프랑크프루트의 '괴테하우스' 앞에라도 가고, 그리스에 갔을 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썼다는 '에기나 섬'이라도 가봐야 했다.

작가, 화가, 건축가 등 가리지 않고 예술가들에게 호기심이 많아 특정 작가가 살았던 공간에 직접 가보고, 공기를 마셔보고 싶었다.


나는 하나를 깊이 파면 금방 지루함을 느끼는 스타일이라 스스로 덕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덕후라고 했을 때 하나의 카테고리 속에 작은 목차를 깊이 판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카테고리 자체를 덕질하는 스타일 같았다. 특정 카테고리에 해당되기만 하면 뭐든 직접 보고, 뜯고, 즐기고 싶은.

평소에 딸의 덕질 취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는데 너나 나나 거기서 거기, 콩 심은 데 콩난 격.


한때 강력하게 사랑했으나 잊고 살던 전남친같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리자 또다시 30년 전, 친정엄마와 떠났었던 유럽 배낭여행이 떠올랐다.

나의 20대 때가 무라카리 하루키의 전성기를 알리는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같은 아시아권이라 그런지 정서에 쉽게 스며들면서도 서구 문학같기도 한, '익숙한데 낯선' 바로 그 지점을 건드렸다.


하루키 덕에 20대 때 혼자 카페에서 병맥주와 스파게티를 얼마나 즐겼었던가.

술 마시는 선후배 모임이 많았던 90년대, 짬뽕 국물에 소주가 아닌, 외국맥주 한 병과 스파게티의 조합은 괜스레 날 남과 다른 사람처럼 느끼게 해 줬다. 이국에 대한 동경, 특히 유럽 여행, 재즈에 대한 호기심으로 안목을 넓히게 해 줬고.

'한류'라는 건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 해외여행 가면 재패니즈? 차이니즈?라는 질문만 신물 나게 들어야 했던.


하루키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시절의 기억이 손끝에 고스란히 살아난다. 동시대를 관통한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는 건 큰 기쁨이다.

그때는 하루키가 쓴 소설, 에세이라면 무조건 다 사서 읽었다. 애정이 많이 줄어든 현재에도 그의 에세이는 반복해서 읽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아이돌, 애니메이션 굿즈에 열광하는 딸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EXO' 콘서트장에 가느라 늦게 들어오고, 비싼 돈 주고 앨범 사선 '포카'만 소장한다든지 등등 쓸데없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원조는 내가 아닌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은 다 사보고, 작가의 취향을 느끼기 위해 나도 없는 돈과 시간을 꽤 썼었다는 걸 이번 여행에서 깨달았다. 엄마가 봤을 때 나라는 딸은 또 얼마나 이해가 안 됐을는지.


자기 때문에 하루키 박물관을 못 가게 된 안타까움이 같은 덕후로서 이해되던지 혼자 다녀오라고 했지만 아픈 딸을 두고 가긴 그러니 과감히 패스!


한국에 돌아와 오랜만에 하루키의 에세이를 구매했다.

구판이 집에 있지만 상큼해 보이는 신판은 다른 책이니까. 새 책을 구매하니 또다시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서 읽었더니 처음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역시나 잘 쓴 글은 힘이 셌다.


도쿄에서 돌아온 후, 우린 여전히 각자의 방에서 덕질을 하지만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묻게 되는 사이가 되었다.

다음 여행도 또 같이 떠날 기대감과 함께.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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