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여행 2307 (8)
오늘은 숙소가 있는 긴자에서 각자 가고 싶은 곳을 가기로 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성지순례라니, 이러려고 긴자를 거점으로 정한 거 아니겠냐고.
나는 커다란 대형 클립 간판을 본 순간부터 꽂혔던 '이토야' 문구점을, 딸은 'lupin' bar를 꼭 가보고 싶어 했다.
'이토야'는 문덕의 성지로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곳이다
10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문구점이라니 장인정신을 중시하는 일본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딸은 갑자기 웬 bar를 가고 싶어 할까,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궁금해하는 내게 '문호스트레이독스'라는 애니메이션에 나온 장소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
'문호스트레이독스'는 다자이 오사무, 에도가와 란포 등 일본의 실제 유명한 소설가, 시인 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만화라고 한다. 흥미로운 설정 이긴 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인공이 김유정, 이상 같은 생존했던 소설가들과 사건을 해결하는 스토리인 셈인데.
숙소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곳에 바로 '이토야'가 있다니, 너무 기분 좋았다. 12층 정도 되는 건물이 다 문구류로 가득하다니 어찌 설레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한 층 한 층 걸어 오르며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공간의 향도 좋고, 눈도 즐거웠다.
문제는 가격이 대체로 비쌌고, 서울의 성수나 망원 등 워낙 예쁜 문구류를 파는 샵이 많아서 그렇게 새롭진 않았다. 애용하는 미도리의 '트래블러스 노트'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지 않았고.
의외로 사고 싶은 물건이 별로 없어 당황하는 사이 작은 만년필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진열된 몇 백만 원대의 만년필들을 보다 기가 질렸는데, 몇 만 원 대의 휴대성 좋은 만년필을 발견하니 완전 유레카, 시필감도 괜찮았다.
만년필을 쓸 때마다 이때의 추억이 떠오르겠지, 이만한 기념품이 있으랴. 포장은 또 얼마나 천천히 정성스럽게 해 주시는지 황송할 정도였다.
작은 쇼핑백을 달랑거리며 나오는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명품백, 외제차가 있으면 더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작은 만년필로도 이렇게 충만한데 굳이 가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룰루랄라 아이처럼 즐겁게 걸으며 호텔에서 휴식을 하고 나온 딸과 합류했다.
'토리긴'이라는 유명 솥밥집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은 후 드디어 딸의 소원인 'lupin' bar로 갔는데.
bar를 간 적이 언제였던가, 낯선 외국의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lupin bar는 1928년에 오픈해 이곳 또한 거의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한국에 100년 된 bar가 있다는 말은 못 들어본 것 같다. 대학로의 '학림다방'이 7,80년 정도 된 걸로 알고 있고.
다자이 오사무 등 유명 문인들이 실제로 애용했던 공간이었다고 하니 왜 '문호스트레이독스'의 배경으로 등장했는지 알만 하다.
고풍스러운 원목으로 꾸며진 공간은 길고 어두웠고, 사람들로 가득했다. 갑자기 타임머신을 타고 개화기 시대로 넘어온 기분.
좁고 긴 작은 공간에 바텐더 분들이 5,6명으로 꽤 많아서 놀랐고, 그중 70대의 중후한 바텐더 분이 계셔서 또 놀랐다. 흰머리에 검은 조끼를 입으신 그분의 정성스러운 서비스 덕에 5성급 호텔의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 들었는데.
bar 테이블 위 손가락을 넣어 돌리는 다이얼 전화기를 보니 어릴 때 생각이 나서 미소가 지어졌다.
당연히 장식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실제로 사용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진짜 여기 뭐야?
시간여행 하는 기분을 만끽하며 시그니처 메뉴인 'moscow mule'을 마셨다. 알코올이 약하고 맛이 좋아 가볍게 마시기 아주 좋았고.
딸은 가져온 '문호스트레이독스' 만화책을 술잔 옆에 놓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바텐더분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꽤 있다고 하며 어디서 왔냐 등등 물어보셨지만 언어의 장벽으로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게 아쉬웠다.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스르륵 과거로 여행해 유명 예술가들을 만나고 온 기분.
우린 좁은 bar에 외국사람들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시간 여행을 떠났다.
100년쯤은 우스운 긴자의 여름밤이 이렇게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