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여행 2023 (5)
친정엄마가 유럽 여행 가기 전에 가장 신경 써서 챙긴 준비물은 바로 속바지였다.
워낙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문에 속바지나 팬티에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안에 현금을 넣고 다니셨다. 그 속옷 덕분인지 현금은 한 장도 잃어본 적이 없었는데.
절대로 그런 요상한 속옷을 걸칠 수 없는 난 재무팀의 수장으로 엄마를 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친정엄마와 내가 유럽에서 실수로 헤어지게 된다면 둘 다 큰 낭패를 볼 예정이었다.
현금은 엄마에게, 모든 정보와 어설픈 영어는 내가 담당했으니 한쪽은 돈이 없어서, 다른 쪽은 아무것도 몰라서 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 싸워도 2인 1조, 둘이 발목을 묶고 무조건 함께 달려야 했다. 마치 갓난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외국에선 엄마와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불안해졌다.
가까울수록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 가족끼리도 유효하다.
서로의 취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떨어질 수 없어서 한쪽이 끌려갈 때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미술관, 서점 방문하는 걸 즐기는 나 때문에 관심 없는 엄마는 하품을 연발하며 핀잔을 주었고, 나는 눈치가 보여 마음이 다급해지곤 했었다.
딸과의 여행은 그런 점에서 '해방감'을 주었다.
각자 알아서 움직일 수 있으니 각자 가고 싶은 곳에 갔다가 다시 만나면 됐다. 이거야 말로 자유여행의 엑기스, 정수가 아니냔 말이다! 엄마와의 여행은 과장되게 말해서 구속여행, '무늬만 자유'인 여행이나 마찬가지였다.
만화, 애니메이션 덕후들의 성지인 '아키하바라'에 가는 길은 나도 설렜다.
어떤 '카와이'한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딸은 한창 '최애의 아이'에 빠져 있었는데, 일본에서도 그 당시 가장 핫한 애니메이션인 듯했다. 가는 빌딩마다 센터자리를 꿰차고 있었으니까.
'최애의 아이'는 지방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는 사람이 최애 아이돌을 환자로 만나면서 벌어지는 팍팍 튀는 사건들을 다룬 애니메이션으로 나도 나중에 볼 생각이었다. 나중에 '귀멸의 칼날'에 푹 빠질 걸 알았으면 나도 이때 굿즈들을 신나게 구경했을 텐데.
건물 1층부터 꼭대기까지 굿즈들로 빈틈없이 욱여넣은 빌딩들이 하나도 아니고, 열 개, 아니 온 도시가 다 굿즈 빌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더위와 굿즈의 무게에 눌려 입이 저절로 떡 벌어지고 말았는데. 동대문에서 옷과 액세서리로 가득 찬 빌딩들은 봤다만.
굿즈 빌딩들은 대부분 공간이 좁아 굿즈 보랴, 계단 오르랴 하다 보니 더위 때문에 금방 지쳤다.
그 동네가 또 하나 희한했던 점이 '그냥 카페'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그 말인즉슨 '그냥 카페'와 '안 그냥 카페'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메이드 카페'라고, 하녀복장을 입은 귀여운 언니들이 손님들과 재밌게 놀아주는 곳이었다. 종류도 다양해 커피 마시러 들어갔다가 이게 모지? 하고 당황해서 나올 수 있다는 점 주의.
덕후들의 성지에서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으면 안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더위를 피해 얼른 '미스터 도넛'에 들어갔다. 한국에선 철수해 버려 아쉬웠는데 내심 반가웠다.
나를 닮아, 아니 나보다 더 저질 체력인 딸이 이 더위에 얼마나 힘들까, 최대한 쉬었다 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혼자 더 돌아보고 와도 되냐는 것이었다! 진짜로? 갑자기 초능력이라도 생긴 거냐?
이미 '최애'를 만난 아이처럼 눈에 광기를 띈 딸은 빛처럼 사라져 버렸다. '여행은 정신력이다!'라고 생각하는 나도 흘린 땀과 다리 통증으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는데.
혼자 돌아다니다 온 딸은 배터리의 마이너스 영역까지 쓰고 온 사람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러더니 다음날 몸살을 앓았다는... 아악, 여행 중이라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