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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드로잉일기가 준 큰 선물

by 선홍


매일 카페에 가서 작은 노트를 펼칩니다.

처음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작업 때문에 카페를 가기 시작했어요.


오랜 시간 제작사와 계약을 해서 쓰기도 했고, 혼자 쓰기도 했지만 결국엔 영화화되지 못했습니다.

시나리오는 출판을 위한 글이 아니므로 영화화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죠.


머릿속에서 키워왔던 상상 속 세계의 캐릭터들, 고군분투하는 워킹맘 주인공, 서울의 랜드마크에서 뛰어다니던 좀비, 악귀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로 매일 나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도피였을지도 몰라요.

집안일에서, 실패한 시나리오에서, ‘이제 그만 써야 하나’ 하는 마음에서 멀어지고 싶었습니다. 실패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시나리오를 쓸 때는 한 작품을 붙들고 끝도 없이 고치기 때문에 몇 년은 우습게 흘러가버립니다. 자식처럼 키우던 작품이 덧없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흩어졌어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주먹 쥐고 덤볐지만 그럴수록 모래산이 쌓여만 갔습니다.


시간이 하루가 아닌, 1년 단위로 뭉텅뭉텅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십 년 따윈 우습게 흘렀고, 어느덧 반백살이 다가왔어요.

일상의 소중함 따위는 아루지 못한 목표에 쓰나미처럼 쓸려가 버렸고.


문득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일에 그 정도 도전해 봤으면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표지향적 인간의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소중한 줄 몰랐던 사소한 하루의 사소한 순간을 무심코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옆에 짧은 일기가 붙으면서, 일상은 점점 작품 같은 기록이 되어갔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마음을 어루만지듯 연필로 선을 긋고, 커피잔을 그려 넣고, 빵 조각을 기록하다 보니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완성되지 못한 시나리오에 매달려 허비한 시간이, 헛된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줬습니다.

나는 여전히 쓰고 있었고, 그 쓰기는 다른 방식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었던 거죠.


오십이 넘으니 화려한 성취보다 매일의 성실함이 더 빛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림으로 적는 일기는 일상에 있는지 몰랐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했고, 내게 용기를 줬어요.

지긋지긋해졌다고 생각한 이야기 만드는 일에 또 한 번 도전해도 된다는 마음까지 선물해 줬죠.


일기가 예술이 된다는 건 거창한 말이 아닙니다.

사소한 기록이 내 삶을 지탱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충분히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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