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4년째 무명작가입니다.
작가를 도전하기 전까진 큰 실패 없이 살았는데, 마일리지 쌓은 걸로 치면 그 가게의 가장 비싼 메뉴를 제한 없이 먹을 정도로 실패의 기록을 쌓고 있네요.
실패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특히나 저처럼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면 더더욱 견디기 어렵죠.
실패 초반에는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며 두고 봐라, 오기가 발동합니다.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계약한 회사가 빨리 쓰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피땀 눈물을 갈아 넣어요.
그러다 실패 중후반으로 가면 '어, 이렇게 하는데도 안 된다고? 내가?' 심히 당황스럽고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초반보다 실패에 둔감해지긴 하지만 도전하는 일이 점점 두렵고, 피하고 싶어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반복되는 작은 실패라도 계속 맞으면 멘털이 흔들립니다.
자, 이제 어떡할까요, one go냐, two go냐, stop이냐! 그만두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습니다.
예전에 백희성이라는 건축가가 나오는 영상을 보다가 '실패할 기회를 뺏기지 말라'는 조언을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참 현명하신 분이구나, 탄복했던 적이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실패에 일찍 단련되는 편이 나이 들어 실패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돈과 체력면에서도 회복이 훨씬 빠르고.
누가 봐도 실패할 것이 뻔하더라도 겪지 않으면 절대 얻지 못할 경험과 노하우는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겁니다. 2,30대라면 부러 실패할 일을 찾아다니라고 조언하고 싶을 정도예요.
문제는 언제까지 실패할 것인가 하는 것이죠.
끝이 보이지 않아 힘들 때 생각나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책인데요,
어린 시절에 읽은 이후 어른이 될수록 의미를 되새기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
주인공 애벌레는 남들이 죄다 위로 올라가는 기둥이 있길래 나도! 쫓아 오릅니다. 서로 다른 애벌레들을 막 밟으면서 오르고, 미끄러져 떨어지는 애벌레들도 있어요.
대체 위에 뭐가 있는 거야?라고 옆의 애벌레에게 묻지만 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어요. 좋은 게 있으니까 가겠지, 하는 식이죠.
정신 차리고 돌아보니 놀랍게도 여기저기 애벌레 기둥이 가득합니다.
계속 오르고 오르다 지쳐버린 애벌레는 하늘을 우아하고 여유 있게 나는 아름다운 나비를 보고 경이감을 느낍니다. 주인공 애벌레는 혼자 밑으로 내려와 고치가 되는 긴 시간을 견디고 견뎌 마침내 나비가 된다는 감동적인 스토리입니다, 훌쩍.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만 다들 가니까 저길 가면 잘살겠지, 하고 매달리는 대학입시, 승진에 목메는 시간 등등, 인생에 그런 시간들이 누구나 존재합니다.
저도 각종 허탈감을 겪은 후 뒤늦게 누에고치의 시간을 갖기로 작정했던 것이죠. 이렇게 길어질지도 모른 체.
나비는커녕 고치 속에서 말라죽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살 의미가 없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야 하고, 시간은 사정없이 흐릅니다. 누구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도 민폐가 되죠.
의욕이 자꾸만 저하되던 어느 날,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과 그런 순간들로 짜인 일상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삶을 성공과 실패로만 재단하던 시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무심코 갖고 있는 만년필로 아무 종이에다 눈앞에 보이는 걸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삐뚤삐뚤, 예쁘게 그려야 한다는 강박 없이 아무렇게나 그리고, 옆에 짧은 일기를 썼어요. 재밌었습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무가치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의 순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요. 계절 따라 다르게 피는 꽃들, 화단 옆을 따라 걷는 강아지, 카페마다 다른 잔의 모양들...
120킬로로 직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구불구불한 국도를 60킬로로 달리면 보이지 않던 야생화와 나무가 보이듯 아름다움이 보였어요.
그 이후로 매일 드로잉 일기를 쓰게 됐습니다. 의욕저하에서 잃었던 호기심과 재미가 살아나는 것이 마치 '덕통사고'를 맞은 것 같았죠.
'열심히 따라가 보니 별거 없더라'는 걸 경험했기에 '실패해도 go!'를 오늘도 외칩니다. 오십의 힘이자 드로잉일기 덕분입니다.
'나 왜 이렇게 힘들지?' 누가 알아주지 않는 길고 외로운 시간 속에 있다면 당신도 '누에고치의 시간'을 사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나비가 되어 훨훨 날 시간이 우리에게 곧 오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