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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증거

by 선홍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신이 가장 미워하는 인간이 있다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게 할까요?


내가 만약 신이라면 그에게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태어나게 하겠습니다. 돈 많은데 교양 있고, 화목하기까지 한 집안의 금지옥엽으로. 그런 다음 하나씩 하나씩 뺏어가는 겁니다.

어때요,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는가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우리 역사에 존재했습니다.

우연히 본 '벌거벗은 한국사'에서 경혜공주를 알게 되었는데요.


할아버지 세종대왕은 며느리 복이 지지리도 없어 손주손녀가 귀했는데, 아들 문종이 어렵게 어렵게 얻은 자식이 바로 경혜공주였습니다.

그야말로 공주를 보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눈에서 꿀이 뚝뚝, 이후 남동생까지 태어나면서 하하 호호 행복이 궐내에 넘쳐흘렀대요.


그런 경혜공주이니 할아버지, 아버지는 최고의 신랑감을 명문가중에서 고르고 골라 낙점했으며 최고의 신혼집을 위해 민가 30채를 밀어버리라고 명했을 정도였습니다.

공주는 이후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났으면 얼마나 좋아, 잔인한 신은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하나씩 뺏어가는데요.


먼저 그녀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할아버지 세종 -와, 할아버지가 세종대왕이라니!- 아버지 문종에 이어 하나뿐인 혈육이었던 남동생 단종까지 잃고 맙니다.

남동생이 세조에 의해 유배 가고 죽었을 때 얼마나 절망했을까요. 본인도 남편과 유배지로 쫓겨나긴 매한가지였으니.

잔인한 신은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마지막 보루였던 지아비까지 세조에게 잔인하게 죽게 만듭니다.

그러고 좀 미안했던지 '자식 둘만 남겨는 드릴게' 하듯 어린 자식들과 남겨지고 맙니다.


싱글맘이 애 키우기 지금도 힘든데, 가산을 다 몰수당한 조선시대의 가난한 싱글맘이 되다니요!

나. 한때 금지옥엽 공주였거든? 두 배, 세배로 더 억울하고 괴로웠을 겁니다. 죽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죽지도 못했을 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막판에 숙부인 세조가 초라해진 공주를 보니 미안하고 측은했던지 은혜를 베풀었죠.

자유도 주고 돈도 줬지만 생각해 보시라, 내 사랑하는 남동생과 남편을 죽인 철천지원수에게 무릎 꿇고 조아려야 아이와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인 겁니다. 굴욕의 굴욕, 제곱승 굴욕....

너무나 괴로웠는지 어린 자식들을 궁에 놓고 비구니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너무 이해되고도 남지 않나요?

신이 날 사랑한다면 쥐톨만 한 운이라도 초반이 아니라 말년에 줄 것 같습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게 만들고, 쓴맛을 본 후 조금이라도 성공하면 인생에 감사하고 행복할 줄 알게 됩니다. 실패에 내성과 인내심이 생겨 계속 버틸 수 있는 힘도 생기죠.


그러니 계속 실패 중이라면 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처럼.


드로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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