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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순간

by 선홍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지요.


뭐 그런 엄마가 다 있냐, 질책하겠지만 진짜 그랬어요.

지금은 달라졌지만 그땐 야근, 주말 출근도 불사하는 영화계 분위기였고, 시어머니에게 맡겨진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울컥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주말에 아이들을 만나면 미안함에 가진 체력과 재력(?)을 총동원해서 놀아주려다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곤 했었죠.

집에서 살을 비비며 놀아도 충분하겠지만 같이 못 가준 각종 놀이공원들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싶었어요. 문제는 저질 체력, 몇 분의 낮잠이 간절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애들과 놀아주고 지쳐 집에 돌아가면 산더미 같은 빨래,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었죠. 남편이 도와주긴 했지만 엄마로서 해야 할 몫들이 있으니까요.

애들 씻기고, 학교 준비물 챙겨 놀고, 각종 시댁 행사들까지... 에고, 친구들 만날 새가 어디 있나요. 그때 연락이 다 끊기고 말았어요.


노숙자 감성의 꿀 같은 휴식


그나마 아이도 좋고, 부모도 좋으려면 공원나들이가 딱이었죠.

가족과 '북서울꿈의 숲'에 종종 가서 바쁜 와중에 싸간 어설픈 도시락을 돗자리 위에 올렸어요. SNS에 금손 엄마들이 올린 예쁜 도시락을 보면 자괴감이 들었지만 뭐 어때요, 맛만 있으면 되죠.


항상 피곤했던 우리 부부에게 돗자리는 필수품이었습니다. 펼칠 수만 있다면 펼쳐놓고 눕거나 앉아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어요. 애들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돗자리로 돌아와 뻗기 일쑤였고요.

이거 너무 노숙자 감성 아닌가? 싶은 곳에까지 펴놓고 잠시 쉬어야 할 정도로 우리에게 휴식이 간절했습니다.


때는 여름이라 공원 내 계곡 같은 곳에는 물장난 치는 아이들로 가득했었죠.

주변에 그늘이 없는 잔디밭뿐이라 막내에게 잠시 놀라고 한 후 남편과 전 그곳과 떨어진 나무아래 돗자리존에 잠시 누웠습니다.


아, 이 얼마나 꿀 같은 휴식인가...

달콤한 꿀에 적셔진 듯 눅진한 몸이 움직이질 않아요. 가야지, 얼른 애 데리러 가야지, 하는데 땡볕을 가로질러 갈 힘이 없어 좀 더 누워있었습니다.

아, 안 돼, 가자! 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는 겁니다.


미안해, 엄마가 늦게 와서


놀라 받으니 막내가 입구의 안내센터 같은 곳에 미아처럼 있다는 게 아닙니까!

아이가 계곡에서 벗어나 울고 있자 친절한 누군가가 데려다준 모양입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거의 굴러가다시피 그곳까지 뛰어갔어요.


눈물이 멎은 막내가 삐진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거기 그대로 있어야지 왜 움직였냐고 나무라듯 말하고 말았죠.

아이고, 얼마나 한심한 엄마인지 모릅니다. 아이 몰래 눈물이나 훔치면서.

다 큰 아이는 기억도 못하지만 저는 두고두고 미안했습니다. 왜 그때 "미안해, 엄마가 늦게 와서"라고 말하지 못했을까요? 육아서를 많이 읽으면 뭐 한답니까.


팀장역할, 엄마노릇에 나가떨어질 정도로 매일이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니 다 한때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때가 제일 예뻤고, 아이들에게 내가 그렇게 큰 존재였던 적이 없었죠.

하지만 이제 압니다.

아이들에게 능력 있고, 근사하고, 유능한 엄마가 아니라고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요. 저 같은 엄마라도 아이들에겐 소중한 존재니까요.


최선을 다해 버티면 어느새 아이는 자라 있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즐겁게 버팁시다.

지금도 애들 어릴 때 사진을 보면 미안하고 뭉클합니다.

나 같은 엄마를 만나 잘 커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그 깨달음을 매일 가던 카페, 익숙한 그 장소에서 '나'를 위한 단 하나의 행위를 시작하며 찾기 시작했습니다.


카페 '상왕제약' 드로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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