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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Oct 27. 2019

제일 오래된 유적지 케르나베

2018년 4월 4일

리투아니아 체류 2년 차가 되어서야 홀로 렌터카를 빌려 움직이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편도 일차선에서 연달아 나타나는 트럭을 추월하고, 주차선이 그어진 주차장이 없어도 차를 세우는 요령을 어느 정도 파악하면서 한결 과감해졌다. 리투아니아에서는 구글맵의 내비게이션이 아주 잘 작동한다. 통신이 끊기지 않는 한 길을 잃을 염려는 거의 없었다. 카우나스는 지리적으로 나라의 거의 정중앙에 있다.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어디든 당일치기로도 다녀올 수 있었다. 물론 고속도로를 벗어나면 도로가 바로 열악해지기 때문에 거리에 비해 시간은 꽤 많이 걸린다. 


렌터카 이용에 익숙해지면서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곳 중 하나가 케르나베(Kernave)다.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지로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라고 추천한다. 더디게 찾아오는 봄이 드디어 맑은 하늘과 햇살을 비춰준 4월의 주말에 기회를 잡았다. 아직 풍경은 겨울이었지만 맘먹은 김에 케르나베로 향했다. 이곳 학생들에게는 필수 견학 코스라지만, 교통은 상당히 불편하다. 대중교통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구글 내비게이션이 가르쳐주는 최단거리로 차를 몰았음에도, 고속도로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케르나베는 카우나스에서 한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카우나스와 빌뉴스를 잇는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북쪽으로 향하는 지방도로를 한참 간다. 주말인데도 계절이 이른 탓인지 오가는 차가 거의 없어서 호젓한 드라이브가 되었다. 주중에는 연달아 나타나는 트럭이 주말엔 모두 쉬니 더욱 한적했다. 

케르나베 마을은 유적지를 내려다보는 공원같이 예쁜 작은 마을이다.

케르나베는 빌뉴스에서 카우나스를 향해 구비구비 흐르는 네리스 강 유역에 자리한 마을이다. 리투아니아에서 손꼽히는 고대와 중세 주거지 유적이다. 사실 명성에 비해 막상 가보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인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봉긋봉긋한 언덕이 몇 개 모여있는 게 끝이다. 그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강과 숲을 배경 삼은 언덕들은 마치 한국 삼국시대 대형 고분군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무덤은 아니고, 아마 자연 언덕을 좀 더 쌓아 올린 것이 아닐까 싶다. 전 국토가 평평한 리투아니아에서 이 정도 언덕이 모여있는 지형은 매우 특이하다. 방어하기에도 좋고 제사 지내기에도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무려 기원전 8천 년을 헤아리는 석기시대 흔적도 발견했다고 안내판에 쓰여있다.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 흔적도 있고 4세기경에는 로마의 도로가 지나간 흔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제일 중요한 부분은 13세기 말 중세 리투아니아의 가장 오래된 마을 유적이 나온다는 것이다.


안내판의 설명은 상세하고 길다. 워낙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열심히 읽게 되었다. 대략의 내용은 적어도 다섯 군데의 언덕 위 요새(Hill-Forts)가 모여 있었고, 13세기경에 다섯 개의 언덕 요새가 단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1279년의 기록에 리투아니아의 가장 오래된 마을 중 하나로 언급되어있다고 한다. 기록이 있는 시기부터 역사의 시작으로 여기고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기록에 따르면 트라이데니스(Traidenis)라는 대공이 그 시기에 영역을 확장하고 요새 단지를 구축했다고 한다. 대공의 목조 성채, 기술자들과 상인 거주 구역을 갖춘 중세 마을이었다. 독일계 튜턴 기사단(Teutonic Order)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침략한 14세기 말에 사람들이 떠나고 버려졌다. 역사적으로 기록이 남은 것도 바로 그 튜턴 기사단의 침략과 함락 때문이다. 그 후 강물이 쌓아 올린 퇴적층 덕분에 그 시절의 유적이 잘 보존되었다.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케르나베는 영어로 깔끔하게 정리된 안내판이 있었다.

새 것이 분명한 긴 철제 안내판에 이런 설명이 리투아니아어와 영어로 완벽하게 병기되어 있다.  아직 신상품 보호용 비닐도 다 뜯지 않은 안내판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마크도 같이 찍혀있었다. 퇴적층에 묻혀 보존된 고대와 중세 유적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 지원으로 나 같은 외국인이 자세하고 신뢰도 높은 설명을 영어로 바로 읽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발굴과 보존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아직은 자유롭게 걸어 내려갈 수 있지만, 지하철 개찰구 같은 입퇴장 시설을 만들 듯한 설비도 보였다. 유적지를 내려다보며 위쪽에 자리 잡은 현대의 케르나베 마을에는 고고학 박물관도 생겼고, 중세풍 교회나 조형물들을 잘 관리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렌터가 반납 시간 때문에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다. 유럽 변방의 고대나 중세의 출토품들이 대단한 볼거리였을 것 같지는 않고, 유네스코 안내판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읽을 필요도 없었을 것 같다. 그래도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이른 봄에 방문했기에 풀밭도 누렇고 황량했다. 햇살 좋은 주말이었지만 사람도 없어서, 리투아니아 청년 두 명이 앞서 걷고 있지 않았다면 혼자 독점할 뻔했다. 언덕을 올라갈 수 있게 나무 계단을 설치해놓았다. 언덕 요새 중 두 개 정도 올라가 보았다. 중세의 마을이 컸을 리 없으니 그 시절 대공이 요새 위에서 멀리 내려다본 경치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케르나베 마을에서는 이 콘셉트를 잡아 해마다 중세문화축제를 여는데 꽤 유명하다. 중세 리투아니아에서 최초로 교황의 인정을 받아 왕위를 받은 민다우가스(Mindaugas) 왕의 대관식 기념일이 한여름인 7월 6일이다. 그때 축제가 열리고 조용한 동네가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곳이 민다우가스 왕과 연관이 있는 줄 알았다. 그건 아니고 퇴적으로 보존된 고고학 유적지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관광객이나 축제 방문객으로서는 학술적인 고고학 유적과 유물보다는 마을에 만들어 놓은 제단이나 철갑늑대 동상 같은 조형물에 더 관심이 갈 것이다. 어쨌거나 역사적인 의미를 찾고 즐기는 문화로 공유하고 있으니 좋은 일이다. 

흔적을 찾고 되살리면서 현대의 문화로 누리기도 하는 리투아니아의 중세는 오늘도 계속된다. 

케르나베 마을에는 축제때 눈길을 끌 조형물이나 제단도 꾸며져 있다. 중세 전설에 나오는 철갑늑대가 나름대로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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