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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y 19. 2018

악마 박물관, 발트의 도깨비 이야기

2018년 5월 9일

악마 박물관(Devil's Museum)은 카우나스 관광정보의 꽤 우선순위에 나오는 특이한 박물관이다. 3천 점이 넘는 악마 형상을 소장한 세계 유일의 악마 전문 박물관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소재와 '세계 유일'이라는 문구 때문에 사람들이 꽤 찾아온다. '악마'라는 이름 때문에 무서울 것 같지만 공포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로테스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재치와 유머에 가깝다. 악마보다는 '도깨비 박물관'으로 표기하는 게 맞다. 한국의 도깨비는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생활과 밀착해있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악마들도 생활과 민속문화에 스며든 것들이다. 소장품이 늘어나서 증축도 하고 전시에 공을 들인 티가 나지만, 너무 기대하면 실망한다. 건물도 영 밋밋하고 3천 점이라 해도 비슷비슷하고 작은 것들이라 관람도 생각보다는 금방 끝난다. 

악마 박물관 외관은 그저 밋밋한 소련식 빌딩이다.

여기도 미루고 미루다 체류 2년이 되어갈 때쯤에야 방문했다. 츄를료니스 미술관 계열이라 수요일 관람이 무료임을 알아내고 거기 맞췄다. 입장료를 내도 비싼 것은 아니지만 굳이 무료 관람일을 피할 필요는 없었다. 박물관의 시작이 된 수집가의 사진 속 얼굴은 악마와는 무관한 순한 인상이었다. 카우나스 토박이인 악마 수집가 미술 선생님 Antanas Žmuidzinavičius(1876–1966)의 집도 박물관에 연결된 그대로 남아 기념관이 되었다. 집 옆에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하는 게 옳다. 3층 집은 20세기 초 중산층의 생활을 보여주고 집주인의 그림 작품이 많이 걸려있다. 그림은 풍경화가 대부분이고 교과서적인 유화다. 성실한 미술 선생님 이미지에 꼭 어울렸다. 이 사람이 악마 수집가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으니 사람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악마 수집가가 된 미술 선생님과 선물 받은 첫 악마 수집품

악마 수집가가 된 미술 선생님은 자신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악마 소품들이 "계속 찾아오더라"라고 했다. 발단은 지인들에게 받은 선물 중 우연히 악마 조각품이 연달아 들어왔던 거였다. 악마 조각에 관심 있다고 소문이 났다. 여기저기서 보내 주기 시작했고 금방 컬렉션이 되었다. 그가 사망한 1966년에 300개가 좀 안 되던 수집품을 모아 공개했다. 이후 수십 년간 계속 기증을 받아 3천 개가 넘었다. 간혹 어두운 데서 갑자기 보면 무서울 만한 가면이나 신상도 있다. 대부분은 해학적이며 창의적이고, 귀엽기도 한 생활용품이나 장식 소품이었다. 생활 곳곳에 숨어있는 미신이나 전설에 맞추어 꽃병, 그릇, 악기, 담뱃대, 등잔 등 다양하기 그지없다. 악마와 동물, 악마와 음악, 악마와 술 등 악마가 좋아하거나 힘을 발휘한다고 전해지는 주제와 엮어서 전시가 되어 있었다. 흔히 악마와 연관 짓는 마녀나 주술 같은 것도 소개해 놓았다. 

3층에는 세계 각국 민속문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탈이 있다. 한국의 도깨비 문양 시계 장식품도 있다.

전시관 3층은 리투아니아가 아니라 해외, 거의 전 세계에서 모여든 도깨비를 모아놓았다. 박물관이 유명세를 탄 뒤 각국에서 선물한 것이다. 한국의 도깨비 문양 장식품도 눈에 띄었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의 가면과 다양한 기념품도 있다. 소련 치하에서도 이 박물관은 계속 운영되었다. 그래서인지 구소련 국가들 것이 많이 와있다. 우크라이나, 조지아 도깨비들은 유난히 통통하고 귀여운 현대적 소품이었다. 나라마다 민속 축제가 있다 보니 가면과 탈 종류가 많다. 리투아니아도 특정 지역들에 전승되어 오는 탈 축제가 있다. 종이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기괴한 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악마의 술 보드카 관련 작품들

결국 전시는 각지에서 구했거나 보내온 공예품들이다. 전시물 자체보다도 섹션마다 악마 이야기를 조금씩 소개한 것들이 흥미로웠다. 리투아니아를 포함하여 발트와 주변 지역 악마 설화, 도깨비 이야기다. 친절하게 영어로도 써 놓았다. 이교 신앙과 겹쳐 민속으로 남은 이 지역 전설 같은 것이다. 술 마시는 악마 조각 옆에 '악마의 술'로 알려진 보드카 이야기를 적어놓는 식이다. 보드카 첫 잔은 나를 위해, 둘째 잔은 너를 위해, 하지만 세 잔째부터는 악마의 것이라 정신을 잃고 위험한 짓을 하게 된다고 한다. 악마를 화제로 삼은 생활 속의 농담이다. 좀 더 플롯을 갖춘, 겨울밤에 할머니가 군밤 구우며 해주실 듯한 이야기도 여럿 붙어 있었다. 재미있게 읽은 것 중 몇 가지만 대략 소개해볼까 한다. 모두 어딘가 친숙한 이야기들이다. 

악마와 춤. 여인들은 악마와 춤추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미녀와 춤추는 악마 장식품 옆에는 '소녀들은 악마가 춤추자고 하면 절대 응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춤을 좋아하는 악마는 홀로 있는 아가씨들을 노린다고 한다. 

- 한 아가씨가 마구간에서 일하는데 악마가 나타나서 춤을 청했다. 들은 얘기가 있는 아가씨는 말을 빙빙 돌리면서 첫 닭이 울어 새벽이 될 때까지 춤을 피했다. 동이 터서 악마가 사라졌고 그래서 그 영리한 아가씨는 안전하게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처음에 이 이야기는 이해가 안 됐다. 악마랑 춤추면 악마와 결혼해야 한다던가 하는 장난인가 했다. 몇 칸 건너 악기 연주하는 악마 장식품 옆에 그 답이 붙어있었다. 악마의 연주 요청에 응하면 그 음악가는 놀라운 연주 실력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악마의 연주를 하면 대가가 따르니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 한 젊은 연주자가 숲 속에서 악마를 만났는데 파티에서 연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사례를 두둑이 받기로 하고 악마들의 파티에 가서 연주했다. 이상하게도 수많은 악마가 오직 한 여성과 돌아가면서 춤을 추었다. 밤새도록 연주하고 사례를 받은 연주자는 그만 잠들고 말았다. 깨어 보니 늪지대였고 자기가 받은 사례는 전부 진흙이었다. 그리고 근처 어느 집 아가씨가 그 전날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악마의 사례는 사기이고, 악마와 춤을 추면 죽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제일 무서운 축에 속했다. 생활용품 속에서 만난 악마들은 더 인간적이고 제 꾀에 당하기도 하고, 인간과 '밀당'을 하는 느낌이었다. 간단한 이야기로는 '악마와 사과를 따러 가지 말라'는 속담이 있었다. 

- 한 농부가 바구니를 들고 사과 따러 가는데 악마가 같이 가자고 했다. 사과나무 밑에서 악마는 농부더러 나무 위에 올라가서 사과를 떨어뜨리면 받아서 담겠다고 했다. 물론, 악마는 사과를 채운 자기 바구니와 농부의 바구니를 몽땅 들고 도망가 버렸다. 

이런 건 도깨비장난에 당하는 이야기라고 치고, 악마가 당하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나라 도깨비도 내기를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발트 악마들은 사람과 내기해서 지는 경우도 많은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도깨비처럼 이곳 악마도 재물신의 이미지가 있다. 돈이 많거나 돈을 좋아한다. 

- 악마가 집주인과 내기에 져서 큰 약점이 잡혔다. 뭐든 줄 테니 봐달라는 악마에게 집주인이 꾀를 내어 "우리 집 굴뚝에 자루를 걸어놓을 테니 거기 돈을 채워달라"라고 했다. 집주인은 밑바닥이 뚫린 자루를 굴뚝에 걸쳐놓았다. 악마는 온 집과 굴뚝에 가득 찰 때까지 돈을 가져다 부었다. 

- 악마가 주인과의 내기에 져서 그만 노예가 되어버렸다. 시키는 것을 무엇이든 해야 해서 수년간 고된 노동을 도맡아 했다. 어느 날 전쟁이 터졌고, 주인집 모두 부랴부랴 피난 가느라 악마를 챙기지 못했다. 일을 해야 하는 악마는 피난 준비에 정신없는 하녀에게 "이젠 무슨 일을 할까요?" 하며 계속 절박하게 물었다. 하녀는 정신없는 와중에 짜증이 나서 "지옥에나 가버려! Go to hell!"라고 외쳤다. 악마는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재빨리 지옥으로 돌아갔다. 

이 두 이야기는 앞부분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전시물보다도 이야기가 재미있었는데, 한꺼번에 너무 많이 읽어서 정확히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언제 다시 가봐야 할 것 같다. 놓친 것 같은 작품도 있다. 다녀와서 검색해보니 '히틀러와 스탈린이 리투아니아 위에서 악마의 춤을 추는 작품' 대한 감상이 많이 올라와 있는데, 난 그 작품을 못 본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면 리투아니아의 웬만한 악마는 명함도 못 내밀 것이다. 조그만 작품도 아닌 듯한데 왜 못 봤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수요일은 무료여서 박물관마다 학생 단체 견학이 많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악마보다 더 신기한 동양인 관람객을 너무 열심히 쳐다본다. 영어 연습하듯 인사를 시도하는 아이들도 많다. 아시아 사람들이 넘쳐나는 서유럽 대도시와는 이런 게 참 다르다. 간혹 기분이 나쁘지만 아이들은 악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응대해주는데, 그러면 사진을 찍자며 몰려든다. 악마보다 더 호기심 유발 대상이 된 걸 고마워해야 하는지 슬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큼직한 악마 목공예품 중에는 소장하던 사람이 불길하다며 버리듯이 보내온 것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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