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4일
2018년 5월의 리투아니아는 고맙게도 눈부신 여름 날씨를 선사하고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는 연일 남북정상회담, 4.27 판문점 선언, 북미 정상회담 예측 뉴스가 나왔었다. 북한은 세계적인 관심사여서 리투아니아 현지 뉴스도 가끔 다루었다. 매일 스마트폰으로 한국 뉴스를 보다 보면 리투아니아의 여유롭기 그지없는 햇살이 너무 이질적으로 보여서 이상하게 느껴졌다. 인터넷과 SNS로 소식은 실시간 접하지만 현실감이 떨어진다. 하늘과 햇빛을 즐기느라 잠깐 산책 갔다 오면 그 사이에 한국은 새로운 일들로 드라마의 다음 회를 쓰고 있었다. 드라마는 보기 시작하면 심취하지만 안 보면 또 그만이다. 스마트폰을 끄면 발트의 하늘을 가득 채운 5월의 햇살을 만끽하는 것만도 시간이 부족했다. 한반도의 정치외교 드라마는 어느새 잠시 잊는다.
한반도 드라마보다 눈앞의 햇살이 더 강한 유혹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빌뉴스 구시가의 볼거리를 찍어보았다. 5월 들어 작은 박물관들도 개장 시간을 늘리면서 관객몰이에 더 적극적이다. 한 번쯤 가보리라 생각했던 작은 박물관 몇 개를 골랐다. 리투아니아의 민족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곳도 많지만, 폴란드와 하나 되었던 역사를 보여주는 곳도 있다. 16세기 중엽 이후 사실상 한 나라를 형성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Commonwealth)'의 중첩된 역사는 많은 흔적을 남겼다. 정식 명칭은 the Crown of the Kingdom of Poland and the Grand Duchy of Lithuania로 되게 긴데 흔히 줄여서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라고 불렀고 18세기 말 3차에 걸친 소위 '폴란드 분할' 전까지 존재했다. 분할 후에는 리투아니아 전 지역은 러시아에 속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모두 국내외에서 독립을 향한 열망과 노력이 끈질기게 이어졌다.
빌뉴스 구시가 남동쪽에는 폴-리 연합왕국의 시작과 끝을 기억하는 군사유적이 있다. 우주피스에서 남쪽으로 빠져나오면 비스듬한 언덕 위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그 위에 중세 성벽 일부를 재건한 요새(망루) 박물관(The Bastion of the Vilnius Defensive Wall)이 있다. 16세기 초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왕(겸임)이었던 야기엘론 왕이 성벽을 건축하게 했다고 한다. 1569년 공식으로 연합왕국을 형성하기 전부터 이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배층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거의 겹쳐 있었다. 비타우타스 대공의 전성기 이후로 영토도 줄고 위상이 약화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러시아나 스웨덴의 군사적 위협으로 계속 고비를 맞았다. 폴란드와의 연합은 군사적 약세를 만회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연합왕국을 이루기 얼마 전 일단 완공했다고 하는 빌뉴스 성벽과 요새는 연합왕국 시절 내내 전쟁이 계속되어 증축과 개축을 반복했다. 성벽 건축가는 전혀 모르지만 빌뉴스에는 석공 길드, 목수 길드도 있었고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독일이나 이탈리아 기술자들이 오갔을 거라 추정한다.
요새 안 전시실에는 중세 리투아니아와 폴-리 연합왕국의 전쟁사 설명과 함께 출토된 무기나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다. 전쟁의 연속이어서, 상대가 독일 기사단이냐 러시아냐 스웨덴이냐만 보고 쓱쓱 지나쳤다. 러시아든 스웨덴이든 승기를 잡아 빌뉴스를 점령할 때마다 다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력도 재정도 오그라든 연합왕국은 수복 후에도 제대로 성벽 개보수를 할 수 없었다. 성벽은 18세기에 이르러 제 기능을 잃고 쓰레기장이 되었다고 한다. 18세기 말 연합왕국이 사라진 후 러시아 치하에서 급속도로 허물어져 19세기 초에 다 없어졌다. 대포 진지 겸 무기고였던 이 요새 자리도 쓰레기장이었다가 최근에 고증을 기반으로 새로 지어 올린 것이다. 남은 자료나 유물이 별로 없어 관람에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 쓰레기장으로 방치된 요새 지하에 '괴물 뱀(basilisk)이 산다'는 소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구석에 어두운 방을 만들어서 용인지 뱀인지 모를 모형을 하나 만들어두었다. 가족단위 관람객을 끄는 노력인가 싶었다. 그보다는 빌뉴스 구시가가 보이는 전망으로 관람객을 끄는 게 좋을 듯한 곳이다. 널찍한 망루는 그리 높은 지대도 아니건만 평평한 빌뉴스가 멀리까지 펼쳐져 보였다.
빌뉴스 구시가 골목에서 성 안나 성당으로 빠지는 길 한 켠에는 폴-리 연합왕국의 문화적 유산이자 자랑을 간직한 기념관이 있다. 러시아에 푸시킨이,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여기는 이 사람,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츠(Adam Mickiewicz)다. 리투아니아어로는 아도마스 미츠케비츄스(Adomas Mickevičius)라 한다. 자신도 폴란드 이름을 썼고 모든 작품을 폴란드어로 쓴 폴란드 시인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부르면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한다. 폴-리 연합왕국의 후손으로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의 민족시인'이다. 1795년 3차 분할 직후 러시아로 편입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노보그루데크(Nowogródek)에서 1798년에 태어났는데 그곳은 지금 벨라루스다. 젊은 시절은 지금의 리투아니아에서 보냈다. 빌뉴스 대학을 졸업한 후 카우나스의 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4~5년 일했다. 빌뉴스 구시가의 이 집은 카우나스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던 시절, 여름방학 기간에 3개월간 휴가로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빌뉴스 대학에서 관리하는 기념 박물관이 되었는데 폴란드 관광팀이 많이 와서 폴란드어 안내가 잘 되어 있다. 카우나스에서 그가 쓰던 탁자와 의자도 가져왔고 파리에서 안락의자도 가져왔다. 학위증, 편지, 메모도 있고, 아내와 애인들, 아이들 이야기, 그에 대한 그림, 사진, 조각상, 기념우표까지 모아서 전시물이 꽤 많았다.
카우나스에 근무하던 미츠키에비츠는 빌뉴스 대학시절 가입했던 비밀 학생단체 활동이 탄로 나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빌뉴스 시청사 광장 한쪽에는 그때 몇 달 갇혀 있던 감옥 자리(수도원을 개조)도 표시되어 있다. 유형까지는 아니고,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며 꽤 인기 있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푸시킨과도 친했다고 하니, 시를 사랑하는 러시아에서 시인은 반러시아 독립운동가일지언정 상류사회의 손님이었다.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추방이 풀린 뒤에는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에서 망명자로 살았다. 대부분은 파리에서 보냈다. 괴테와 쇼팽도 친구였다니 대단한 인맥이다. 막상 지금의 폴란드 땅은 별로 간 적이 없다. 당시 프로이센 영역이었던 포즈난에 잠시 방문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폴란드 바르샤바에도, 크라쿠프에도, 중심가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커다란 그의 동상이 있다. 빌뉴스에도 꽤 큰 석상이 있다. 성 안나 성당과 우주피스 사이에 사색하듯 서 있다. 폴란드 관광팀이 오면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가는 곳이다.
평생 유명인사였고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도 꾸준한 애국자였지만 망명이라는 삶은 결코 유복하다고 할 수 없었다. 파리에서도 폴란드 망명자 신분을 유지했기에 운신의 폭이 넓지 못했고 고정수입도 없고 가족사도 평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단주의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고 가망 없어 뵈는 무력투쟁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근대 국가로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독립은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120년 넘게 걸렸다. 19세기 격변하던 유럽 정치 틈바구니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독립을 꿈꾼 것만으로도 존경할 만하다. 그가 되찾고자 한 조국은 국가로서의 폴란드라기보다는 분할 전의 연합왕국 지역 전체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표적 민족서사시 '판 타데우스'는 "나의 조국, 리투아니아"를 부르며 시작한다. 그렇다고 지금의 리투아니아 국가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한반도 분단 전에 형성된 재외동포사회 어르신들의 '코리아'가 꼭 남한이나 북한 중 하나를 지칭하는 게 아닌 것과 비슷한 느낌도 든다.
너무 많은 것을 백화점처럼 보여주는 대형 박물관보다 스토리 있는 장소들을 작게 꾸민 이런 박물관들이 더 큰 느낌을 주곤 한다. 시인 미츠키에비츠가 카우나스에서 선생님으로 일했던 고등학교는 지금도 예수회 소속 김나지움으로 꽤 좋은 학교다. 그 학교 부지 한편에 '천둥의 집(House of Perkūnas)'라는 희한한 이름의 중세풍 3층 벽돌집이 있다. 언제 왜 지어졌는지는 몰라도 벽감 속에서 옛 이교 신 '천둥' 신상이 발굴되어서 이름이 저렇게 되었다. 건물 자체는 중세 한자 무역상의 부잣집 정도로 추정한다. 주인이 많이 바뀌다가 미츠키에비츠가 오기 전부터 그 예수회 학교 건물로 쓰였다고 한다. 1819년에서 1824년까지 근무했다는 시인 선생님이 그 건물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천둥의 집도 박물관으로 바뀌어 2층을 전부 미츠키에비츠에게 헌정하고 있다. 박물관이라고 하기에는 유물이나 설명도 빈약하다. 그를 기념하며 문화 강좌나 세미나, 현대미술 전시에 사용하고 있다.
역사야 어떻든 오늘날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오늘의 햇살을 충실히 즐기고 있다. 카우나스와 빌뉴스에서 'Open Kitchen'이라는 푸드트럭 행사를 했다. 한국의 여의도 강변에서 하는 푸드트럭 행사처럼 강변을 잡아 하루 종일 했다. 푸드트럭 수가 한국보다 훨씬 적었지만 다문화 메뉴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있었다. 카우나스에서는 '우즈베크 친구들'이라는 부스에서 키르기스식 만두를 사서 우물거리며 구경을 했다. 양배추를 깔고 찐 왕만두였는데 한국 고기만두와 중국 샤오롱바오를 합친 맛이었다. 빌뉴스에서는 아르메니아 식 디저트(터키 바클라바와 비슷)를 사 먹으며 구경했다. 앉을자리를 많이 만들고 비치의자도 쭉 놓아 여유를 즐기게 해 놓았다. 나는 낮에 갔지만 아마 해가 길어진 저녁에 붐볐을 것이다. 빌뉴스 게디미나스 대로에서는 '유럽의 날' 5월 9일을 전후해서 유럽 음식 행사도 펼쳐진다. 유럽의 특성상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국가 간 경계가 흐릿해진다. 국가보다는 도시별로 정체성을 찾는 게 유럽 문화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며 어우러지는 행사나 축제가 많다. 미츠키에비츠도 우리나라 사람이냐 너네 나라 사람이냐의 논쟁은 도무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도심의 축제는 초여름 날씨와 환상의 궁합이다. 구름 한 점 없는 5월 날씨는 소박한 축제도 더없이 화려하게 만든다. 1855년 이스탄불에서 콜레라로 급사한 시인이 그리던 독립국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정도면 참 좋지 않은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