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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y 16. 2018

리투아니아 대표 천재 츄를료니스

2018년 5월 2일

4월 마지막 주부터 급속하게 따뜻해지면서 20도가 훌쩍 넘는 맑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겨울이 끈질겼던 만큼 봄도 승리에 도취되었는지, 도취가 지나쳐서 거의 여름 날씨가 되어버렸다. 단지 며칠 만에 여름을 바짝 당겨온 화창한 하늘은 계절의 여왕 5월은 이런 것이라는 듯 눈 부시고 등 따가운 위력을 발산했다. SNS를 보니 서울도 초여름 날씨라지만 미세먼지 때문에 즐기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들린다. 여기는 해만 뜨면 공기는 걱정 없이 무조건 나간다. 좀 늦게 찾아온 봄이지만 서울보다 잘 즐기게 되는 듯하다. 

카우나스의 전쟁기념관 뒤편에 자리한 국립 츄를료니스 미술관 전경

날씨가 좋으니 리투아니아의 면면을 더 열심히 보고 다녀야겠다는 의욕이 솟았다. 그 의욕을 발휘하여 드디어 카우나스가 자랑하는 M. K. 츄를료니스(Čiurlionis) 국립미술관을 찾았다. 발음이 참 어려운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츄를료니스(Mikalojus Konstantinas Čiurlionis)'는 1875년에 태어나서 1911년에 겨우 36세로 요절한 화가이자 작곡가이다. 러시아 제국 치하에서 리투아니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음악과 미술 모두 천재적이어서 전무후무한 인물이 되었다. 당시 유럽 전체 차원으로 보아도 매우 특이한 작품세계를 보여준 인물이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리투아니아 예술가 연맹'을 만들거나 리투아니아 민속음악을 보급하는 등 상당히 민족적인 공헌을 한 천재다. 근현대 리투아니아에서 제일 유명한 위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미국 NBA농구에서 명성을 날렸던 농구선수 사보니스 다음으로 거론될 만큼(!) 모두 인정하는 위인이다. 그의 작품을 모아 놓은 미술관이 카우나스에, 학교에서 지척에 있었다. 

노동절에 문 닫은 미술관 앞에서 조각공원만 구경

동네라고 방심해서 그랬는지, 츄를료니스 만나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필 처음 맘먹고 찾아간 날이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한국에서 노동절은 근로자만 쉬지만 여기서는 모두 다 쉬는 공휴일이다. 화요일이었기에 월요일을 휴가로 합쳐 초여름 날씨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말에도 문을 여는 미술관이었기에 휴일에도 열릴 줄 알았던 게 패착이었다. 근로자인 직원들이 쉬어야 하니 닫혀 있으리라는 당연한 생각을 미처 못한 탓이다. 왠지 오기가 나서 다음날 2일에 곧바로 다시 갔다. 그랬더니 4유로 입장료가 수요일마다 무료라며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퇴짜 맞았다가 공짜로 들어가다니, 천재를 만나는 과정은 예측불가다. 

특별전시실의 1920~1930년대 '비타우타스 위원회' 기념전

상설전시실의 그를 만나기 전에 특별전시실에 먼저 들렀는데, 여기도 공화국 100주년 기념 전시가 있었다. 1918년에 처음으로 독립공화국을 선포한 리투아니아 현대사의 황금기를 기념하는 전시가 2018년 내내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는 츄를료니스보다 백배는 더 유명한 중세의 비타우타스 대공을 본격적으로 기리기 시작한 1920~1930년대 행사 사진과 기념물들이었다. 중세의 대공을 현대 공화국의 정체성 확립과 단합을 위한 영웅으로 추대한, 즉 '영웅 만들기'를 했던 당시 '비타우타스 위원회'의 활약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1차 대전 후 처음 공화국으로 '국가 회복'을 했지만 내부적인 다양성과 분열 가능성이 큰 약소국이었다.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상징이 필요했고, 마침 서거 500주년을 맞은 비타우타스 대공을 기리는 행사를 크게 하기로 했다고 잘 설명해 놓았다. 그러고 보면 원래 '리투아니아 대학교'였다는 VMU(Vytautas Magnus University)가 비타우타스 대공 이름을 따서 명칭을 바꾼 것도 바로 그 서거 500주년 때다. 재정이 부족했기에 대규모 행진이나 집단체조, 연극 공연 등 인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나라의 결속을 다지는 행사로 삼았다. 비판도 많았다고 하지만, 신생 약소국의 토대를 다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평가하고 공로를 치하하는 전시였다.

츄를료니스의 아내 소피아도 작가였고, 그의 작품 보전에 큰 역할을 했다. 해외 전시 포스터 중에는 일본전시회 것도 있다.

츄를료니스의 일대기를 설명해 놓은 지하부터 시작해서 2층의 그림들을 천천히 감상했다. 원래 미술에는 안목이 없는 데다 현대미술은 더욱 이해 불가여서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차일피일 방문을 미룬 이유이기도 했다. 연대별로 정리한 인생 이야기를 훑어볼 때만 해도 참 어려운 시대에 어렵게 살다가 요절한 천재라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짧은 인생에 꽤 다작이어서 작품은 많이 남아있었다. 천재답게 그림 말고도 작곡도 하고 시도 쓰고 사진도 찍었던 모양이었다. 이해하기 어렵고 사고의 차원이 다를 거라고 짐작했다. 한데 그림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그림들이었지만, 제목을 보고 나면 스토리가 보였고 심지어 정말 예쁘다고 느껴졌다. 동유럽과 러시아 그림들은 역사성과 스토리를 중시한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현대미술인데도 스토리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사실적인 묘사가 많은 폴란드나 러시아 그림들과 전혀 다르다. 단순하면서도 매우 환상적이고 동화적이다. 서너 점씩, 많게는 8개까지 연작으로 이어지는 그림이 많았다. 리투아니아의 자연과 계절을 묘사한 연작도 있었고 신화적인 이야기나 별자리를 여러 개로 나누어 그리기도 했다. 그림에 따라 우울함이 깃들어 있기도 했으나 예상과 달리 밝은 색감이 대부분이어서 보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고 위로를 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창 유명해져서 활동하다가 갑자기 폐렴으로 숨졌다. 사후에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작품 보전과 전시를 계속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을 했던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그림 재료가 전부 파스텔이나 수채화 같은, 변질되거나 망가지기 쉬운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두 번의 세계대전과 소련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듯했다. 초현실적인 상상의 세계를 그렸지만 보는 사람이 전혀 난해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실제로는 난해할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목도 명확하고 주제가 잘 보이는 그림들이라 보는 내내 즐거웠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츄를료니스를 그리 좋아하고 이 미술관을 강력 추천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을 위한 그림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동화나 신화 세계를 예쁘게 펼쳐 놓은 그림들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림 중에도 '소나타' 등의 이름을 붙인 연작은 음악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리투아니아의 사계절을 각각 소나타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어 '여름 소나타'는 4개의 그림으로 '알레그로-안단테-스케르초-피날레' 이런 식이었다. 그림을 보고 나오는 길에 그의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난해한 현대음악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음악은 더없이 고전적으로 들렸다. 잠깐 듣다 나와서 특색을 못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장중하면서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 곡이었다. 그림에 음악을 표현하려 했던 것처럼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듯 하려고 했나 싶었다. 그래서 음악도 난해하기보다는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쉽게 표현하는 쪽에 가까웠던 듯하다. 

빌뉴스에는 츄를료니스가 1907~1908년경에 살았던 집이 기념관 겸 문화공간으로 공개되어 있다. 당시 이미 유명했고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활동하다가 온 예술가였음에도 경제적으로는 결코 풍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방 하나에 세를 들어 살았고 여기서 훗날의 부인을 만났다. 그 방은 기록과 증언에 따라 책상과 의자, 피아노를 놓아두고 비슷하게 재현해 놓았다. 셋방 하나 이외의 나머지 공간은 전시장과 소규모 음악홀로 꾸며서 츄를료니스 연구와 기념사업을 겸하여 문화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곳곳에 그가 머물던 흔적을 기리는 장소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건축물도 많이 있다. 

빌뉴스 구시가 골목의 츄를료니스 셋방 건물 기념관

츄를료니스가 살았던 시대는 러시아 차르 통치 말기다. 리투아니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내세우며 예술가 운동을 했다면 압박을 받았을 수도 있는데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18세기 말에 나라가 없어진 후 100년이 넘게 지났을 때이니 리투아니아 예술이나 문화를 보존, 보급, 중흥하려는 노력은 너무 미약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오가며 전시회를 했다고 하니 리투아니아 예술은 흥미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츄를료니스 자신의 예술세계는 꿈과 환상의 세계, 자연의 오묘함이나 개인의 내면을 표현하는 거였다. 민족적 정체성이나 국가 재건 같은 정치적 의도와는 거리가 먼, 매우 개인적 또는 매우 보편적인 내용이라 정권의 신경을 긁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그런 작품만 없앴다거나 뺏겼다거나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러시아 차르나 소련 정권 하에서도 기념사업을 막을 이유가 없었던 순수 예술가였다. 1920~1930년대 첫 독립공화국 시기와 지금은 리투아니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위해서 노력한 빛나는 영웅이다. 자랑스러운 민족 예술가로 추앙되는 이 젊은 요절 천재는, 어쩌면 그저 본인이 하고 싶었던 활동을 최대한 열심히 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성이 없는 순수예술이었기에 작품이 남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행운이고 리투아니아로서는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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