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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Apr 22. 2018

논란 속의 역사 발레 '비타우타스'

2018년 1월 28일

2018년은 리투아니아가 1차 대전 후 처음 근대 민족국가로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독립한 지 100년 되는 해였다. 공휴일인 2월 16일이 그 날이었고, 정부와 민간 모두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일 년 내내 했다. 수많은 행사 중 발레 공연이 눈에 들어왔다. 그 이름도 유명한 '비타우타스(Vytautas)'가 제목이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비타우타스 대공 이야기를 발레로 공연한다는 광고였고 얼핏 보여준 몇 장면의 의상이나 무대도 색달랐다. 리투아니아에서 차이코프스키나 프로코피에프의 발레를 보는 것보다 의미 있고 흥미로울 것 같아서 예매했다. 한 번도 제목을 들어본 적 없었기에 검색을 해 봤지만 영어로 된 설명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예매만 미리 하고 잊고 있다가 부랴부랴 빌뉴스 북쪽 신시가지의 공연장을 찾아갔다.  

리투아니아 삼색국기 색깔의 장식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리투아니아도 러시아처럼 발레가 인기가 있다. 두어 달 전에 예매해야 좋은 가격에 표를 구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공연도 많다. 카우나스의 음악극장도 발레 공연을 하지만 아무래도 빌뉴스의 전용극장이 유명하다. 한데 이 발레는 농구 경기장인 지멘스 아레나(Siemens Arena)를 공연장으로 잡았다. 한국도 대형 공연은 체육관을 빌리는 경우가 많은데 음향이나 좌석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여기도 100주년 기념행사라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체육관을 잡은 것 같았다. 딱 한 번 하는 공연이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빈자리가 꽤 남았다. 발레 전용 공연장에서 했더라면 공연이 더 돋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구장 지멘스 아레나도 처음 갔으므로 좋은 구경이기는 했다. 그래도 오케스트라도 없이 녹음 반주로 하는 공연은 아쉬운 면이 있었다. 

신시가 외곽의 지멘스 아레나는 OZAS 쇼핑몰과 붙어있다. 

리투아니아 공연장은 외투를 맡기고 커피나 와인을 사 마실 수 있는 곳은 잘 되어 있지만 공연 정보를 자세히 알려주거나 팸플릿을 파는 코너는 없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도 비슷했는데 팸플릿이나 안내책자는 직원들이 몇 개씩 들고 드문드문 서있을 뿐, 대부분 관객들은 구입하지 않는다. 굳이 사고 싶은 사람만 그 직원에게 가서 구입해야 한다. 체육관 공연이어서 그랬는지 안내책자 파는 직원을 찾지 못하고 착석하는 바람에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공연 정보를 찾으며 시작을 기다렸다. 비타우타스 대공 이름을 쓰는 발레이니 혹 리투아니아의 작곡가와 안무가가 애국심 충만하게 100주년 기념으로 만들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다면 훨씬 대대적인 홍보와 성원이 있었을 것 같은데 너무 조용했다. 검색에 나오는 대부분의 결과는 영어가 아니라 러시아어다. 발레의 정체가 궁금해지던 중에 줄거리를 영어로 써 놓은 사이트를 발견하고 겨우 시놉시스만 읽어본 채 일단 공연을 보았다. 

역사적 배경이야 어떻든 공연 자체는 사랑과 권력투쟁 이야기여서 유럽 여느 오페라와 이질적인 내용은 아니다. 우리나라 심청가나 춘향가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비타우타스와 요가일라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팸플릿 같은 걸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우리의 영웅 비타우타스와 나쁜 왕자 요가일라는 사촌 지간이고, 가장 예쁜 여인으로 뽑힌 안나를 놓고 싸우다가 비타우타스가 안나의 마음을 얻는다. 요가일라는 권력에 눈이 멀어 폴란드 공주와 결혼하여 왕이 된 다음 비타우타스를 속여 유인해 놓고 그의 아버지 케스투티스 대공을 죽인다. 비타우타스도 요가일라에게 잡혀 갇히지만, 예쁘고 슬기로운 안나가 그를 구출하고 결국 요가일라와 일전을 벌인다. 우리의 영웅 비타우타스는 승리하지만 기독교적 자비로 요가일라를 용서하고 위대한 통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발레 공연이라 축약되어 있고 사랑이야기를 넣느라 실제 역사와 거리가 있으며 영웅 비타우타스의 위대함으로 끝나는 결말은 어색하지만,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갖고 있는 비타우타스와 요가일라 이미지 그대로였다. 한데 관중의 반응은 즐기는 분위기만은 아니고 담담하거나 냉정하기도 해서 좀 의외였다. 독무나 듀엣은 서유럽의 발레처럼 다양하고 유려한 반면 군무 장면은 가운데 주인공을 필두로 과하게 대칭적이고 집단적인 분위기도 있었다. 러시아 발레도 별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집단주의가 강한 시절에 만든 작품인가 싶기도 했다.  

중간 휴식 시간에 이 발레의 정체를 찾아냈다. 리투아니아 독립 100주년 특별공연으로 성황을 이루기에는 무리였던 것이, 리투아니아가 아닌 벨라루스 발레였다. 벨라루스는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러시아와 달리 한국인은 비자가 필요해서 방문할 생각이 잘 안 드는 나라다. 소련 시기의 국가체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독재국가로 유명하다. 러시아와 더 가까운 나라라서 리투아니아와의 관계는 좋지만은 않다. 벨라루스의 쿠즈네초프(Vyacheslav Kuznetsov)가 작곡하여 2013년에 벨라루스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했다는 정보가 있었다. 작년에는 모스크바 볼쇼이에서도 공연했다고 한다. 스토리 역시 벨라루스의 작가 두다레프(Aleksey Dudarev)의 희곡 '비타우타스 대공(Prince Vytautas)'에 기반했다고 되어 있다. 14~15세기 벨라루스의 국가적 기원을 기념하면서 비타우타스와 요가일라라는 당시 두 전설적 지배자의 적대관계를 묘사했다는 설명이었다. 첫 막에 나오는 들소 형상과 이교도적 제사 장면은 중세 이전 리투아니아처럼 이교 문화를 나타내고는 있지만, 벨라루스 지역의 들소 숭배와 직접 연관 지은 장면이었다. 

비타우타스 대공 시절 리투아니아는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엄청난 영토 확장을 이룬 유럽에서 가장 큰 대공국이었다. 당연히 벨라루스와 러시아 일부도 리투아니아의 영역이었고, 그들의 역사에도 비타우타스는 큰 인물일 수밖에 없다. 리투아니아 어딜 가나 비타우타스를 볼 수 있는데, 혹시 벨라루스 곳곳에도 비타우타스가 있는 것인가 궁금해졌다. 중세 시대는 국가 개념 자체가 없고 경계도 흐릿했으니 역사적 영웅이 겹치는 게 이상하지 않지만, 현대 민족국가가 엄연히 따로 설립되어 경계가 명확하고 심지어 그들 관계가 친근하지 않다면 문제가 생긴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2년 전부터 이 발레 공연이 가능하냐 아니냐 논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벨라루스에서는 선심 쓰듯 100주년 축하한다며 공연단을 보내겠다고 하고 민간 기획사에서 추진했는데, 리투아니아 문화부에서는 심히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동쪽 이웃(러시아와 그 친구들)'으로부터 안보위협도 늘고 가짜 뉴스를 비롯해 안 좋은 일이 많은데, 이렇게 역사 인식이 다른 공연을 리투아니아 독립 100주년 기념이라며 수도에서 공연하는 일은 '소프트파워 공격' 아니냐는 문화부 장관의 논평이 있었다. 

러시아를 뒤에 이고 있는 벨라루스, 러시아라면 치를 떠는 리투아니아 사이의 정치적 관계를 일단 접어둔다면, 이방인이 보기에 발레 자체는 흥미로워서 꽤 즐겁게 감상했다. 발레에 안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빈약한 무대장치에도 불구하고 감탄할 만한 멋진 장면도 꽤 많았다. 민속 의상을 변형한 옷도 다소 유치할 때도 있었지만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따져보면 그 모든 게 리투아니아 정부로서는 불편했을 수 있다.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을 합친 위상을 가진 비타우타스다. 그 이야기를 벨라루스 식으로 해석한 스토리에 맞춰 벨라루스 무용수들이 벨라루스 전통의상과 문화적 배경을 뽐내면서 멋지게 공연하고 박수를 받은 것이다. 내 눈에야 벨라루스나 리투아니아나 무용수들의 외모도, 전통의상도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한국과 일본이 외국인에게는 똑같아 보여도 우리에게는 천지 차이임을 생각하면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빌뉴스는 다른 도시에 비해 러시아계 인구의 비중이 큰 도시다. 나와 함께 관람한 객석의 상당수는 러시아나 벨라루스계 주민들이었을 수 있었다. 

모든 축제와 행사마다 삼색 국기와 100주년 표시가 있다.

발트 국가들에게 독립 100주년은 큰 의미가 있다. 쉽게 독립 100주년이라고 말하지만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진짜 첫 독립국 실현이었고, 리투아니아는 '국가 회복' 100주년이라고 부른다. 비타우타스를 비롯해 대공국 리투아니아의 역사가 엄연히 있었으니, 그 정치적 위상을 근대적 의미로 '회복'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첫 독립이든 국가 회복이든 근대적인 독립 공화국을 갖게 된 역사적인 기회였는데, 20년도 못 가 다시 점령당하고 냉전 시기 내내 소련 치하가 되는 바람에 누리지 못했다. 그 독립국가를 그래도 100주년이 된 것으로 쳐서 축하하고 자부심을 다지는 한 해다. 거기에 난데없이 벨라루스 발레가 비타우타스를 '도용'해서 나타났으니, 틀렸다고 부정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복잡한 노릇이다. 그래도 공연을 금지하지 않고 나 같은 이방인이 아무렇지 않게 구경하도록 하였으니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맞다. 러시아계 인구가 자꾸 러시아적 정체성을 강화하려 해서 갈등도 있는 마당에 민주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고민일 것이다. '소프트파워 공격'은 좀 과도한 표현 같지만, 지금의 리투아니아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 독립이 지키기 쉬운 것은 아니다. 응원하는 뜻으로 비싼 표를 샀는데 살짝 선택이 어긋난 셈이다. 어쨌든 국가 회복 100주년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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