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20일
2018년 5월, 이상하리만치 연일 화창한 여름 날씨 속에 카우나스에서 열리는 연간 행사 중 가장 큰 한자 문화 축제가 열렸다. 금, 토, 일 주말에 걸쳐 열리는데, 중세 한자 문화를 주제로 내걸고 있지만 거의 모든 형태의 즐길 거리를 다 모아놓은 초여름의 종합 축제다. 빌뉴스는 한자 무역의 거점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이 이 축제는 카우나스만의 것이라고 강조한다. 네무나스 강 하구의 항구도시 클라이페다도 한자 도시였지만, 카우나스가 축제 기회를 제대로 잡았다. 구시가지 초입에 자리한 대통령궁에서부터 초록색과 하얀색으로 한자 문화 축제 표어와 장식을 내걸고 거리 공연과 장터가 이어졌다. 독립 공화국 100주년도 겹쳐서 한자 축제도 더 다채로운 준비를 한 것 같았다.
리투아니아의 가장 긴 두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카우나스는 중세 시절 물류가 모이는 한자 네트워크의 지역 거점이었다. 흔히 '한자동맹'이라고 번역하는 'The Hanseatic League'는 중세 북부와 중부 유럽에서 상인 길드(조합)와 거점으로 성장한 도시들이 만든 일종의 네트워크다. Hanse라고도 쓰고 Hansa라고도 쓴다. 이름부터 독일스러운 이 도시 간 연맹체는 상업적 유통망이기도 하고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군사적 동맹이기도 했다. 12세기경 뤼벡을 위시한 독일 북부 해안도시들이 시작해서 확산을 거듭했다. 거의 300년 동안 북부 유럽과 발트해 주변 해상무역을 지배하는 강력한 조직으로 군림했다. 중세 말에는 발트해 연안은 물론이고 내륙까지 넓게 퍼졌다.
한자 네트워크는 거점 도시들이 자치권을 가졌던 중세 시스템에 적합한 연맹체였다. 근대로 접어든 15세기 말부터 서서히 와해된다. 영토를 다투는 국가들 사이에서 유지되기 어려운 네트워크였기 때문이다. 도시국가로서 강력했던 몇몇 거점 도시들은 꽤 오래 자치를 유지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지역 주민들에게는 양면성이 있다. 한자동맹은 독일계 상인과 군대가 들어와 식민화를 진행한 경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문자도 종교도 이 물류망을 통해 들어왔고 토착 문화를 밀어내고 지웠다. 정치경제적으로 꼭 원주민들에게 이익이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중세 유럽의 역사에 이 지역이 자리를 잡고 물류와 문화가 통하기 시작한 계기였음은 분명하다.
금요일 오후에 군악대가 자유로 중간까지 행진하면서 공식 축제 기간이 시작되었다. 구시가 광장 너머 두물머리 강변 공원에는 월미도 유원지 급은 될 법한 이동식 놀이기구 풀세트가 잔디밭 가득 자리를 폈다. 산책로와 주차장에는 봄맞이 장터보다도 더 많은 부스가 깔리고 먹거리, 마실 거리, 입을 거리, 장식할 거리를 내놓았다. 구시가 입구에서 구 시청사 광장까지 통하는 길도 대목을 맞았다. 골목 가득 테이블을 깔아 놓은 식당과 카페 사이사이에 거리 공연이 한창이다. 광장에는 무대를 설치해서 아마추어 학생 댄스 동아리부터 가수들, 유명 디제이까지 공연을 이어갔다. 꼬치구이 그릴 연기가 특수효과처럼 퍼져 있었다.
핵심 행사장은 단연 카우나스 성채다. 성채 이편은 광장보다 훨씬 큰 현대식 무대와 조명으로 음악 공연장을 만들었다. 낮에는 아마추어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들이 포크송이나 잘 알려진 클래식 연주를 한다. 맥주와 그릴을 파는 트럭들이 낮부터 있는데 주요 영업시간은 저녁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콘서트일 것이다. 내가 모를 뿐이지 꽤 유명한 록그룹이나 재즈 연주자가 온다는 홍보가 있었다. 카우나스 성채 저편, 강변으로 빠지는 해자 주변 잔디밭이 중세 한자문화 본연의 모습을 표방한 행사장이다. 이 행사장을 가야 '중세 한자 문화'를 내건 축제의 제목에 맞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행사가 너무 많아서 요식행위처럼 되어 버렸지만 가장 핵심 행사고 홍보물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볼거리다. 카우나스 성채를 배경으로 중세 한자문화 분위기를 냈다. 중세 복장을 하고 중세 장식품이나 장난감을 파는 '중세 장터'가 해자 흔적을 따라 강변에 펼쳐진다. 그 옆으로 비탈을 따라 내려다볼 수 있도록 관객석을 설치하고 경기장을 만들었다. 뭔가 중세문화 볼거리를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 경기장이 최대 관심사다.
중세 경기는 두 가지다. 한 편에는 중세 복장으로 중세풍 씨름을 하는 지푸라기 판이 둥그렇게 있다. 모래판은 아니지만 샅바를 잡고 뒤집고 메어치는 경기방식이 우리 씨름과 흡사해 보였다. 레슬링에 가까운 장면도 많이 나왔다. 그 옆으로 난간을 두른 더 큰 둥근 공간이 바로 기사들의 검술 대결장이다. 작년에 놓쳐서 이번에는 일부러 시간을 확인하고 가봤다. 진짜로 갑옷을 입고 큰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토너먼트 경기다. 씨름도 그렇지만 이 검술도 공연이 아니라 경기다. 심지어 국가대항전이다. 폴란드, 라트비아 등 발트 주변 한자동맹 국가들의 대표선수들이 와있었다. 각자 천막에서 준비하고 나오고, 주심과 부심, 코치, 도우미도 다 중세 복장을 했다. 권투 시합과 비슷한 라운드 형식이었다. 펜싱처럼 칼이 닿은 부위에 따라 포인트가 있어서 승패를 갈랐다. 햇볕 내리쬐는 더운 날씨에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라 체력이 강한 쪽이 승산이 있었다. 1등 트로피는 장검, 2등은 도끼, 3등은 단검을 준다.
중세 문화축제에 중세 행사가 너무 적다. 한국 같으면 전통 축제에 전통이 너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지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두물머리 공원 근처 네무나스 강변에서는 모터바이크 전시와 퍼포먼스 시합도 열렸다. 물에서는 곡예에 가까운 제트스키 시범과 다양한 수상기구를 선보였다. 올해 축제 기간은 심지어 남자 농구 유럽 리그의 결승전이 겹쳤다. 카우나스의 잘기리스(Žalgiris)팀이 4강에 진출해 있었다. 금요일의 4강전, 일요일의 결승전 모두 축제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단체 관람을 하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 초록색 옷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 한자 축제 주요 색깔이 초록색과 흰색인 것도 다 농구 때문인 듯했다. 잘기리스 팀 색깔이다. 응원 구호도 응원 노래도 '잘리아-발타(Žalia Balta, 초록 하양)'다. 결과적으로 4강에서 지는 바람에 일요일에 3-4위전을 해서 3위에 머물렀다. 그래도 3-4위전 대상이 모스크바 팀이었으니 러시아를 이기는 쾌감은 있었을 것 같다. 농구로 울고 웃는 카우나스 사람들에게 잘기리스 팀은 무조건 세계 최고의 팀이다.
밤에는 구시가 전체가 그야말로 클럽으로 변모한다. 성채 주변뿐 아니라 구시가 광장과 골목들까지 디제잉 테이블이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클럽이 된다. 작년에 교환학생들이 보내 준 사진에 찍힌 구시가의 축제 밤거리 모습에 놀란 적이 있다. 야외 클럽으로 돌변해서 맥주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레이저쇼와 불꽃놀이까지 보려면 자정까지 돌아다닐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 한자 문화는 순전히 핑계고 밖에서 놀고 싶었던 모든 기다림을 분출하는 모양새다. 생각해보면 기록도 별로 없는 중세의 전통에 얽매이기보다는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기회로 삼는 것도 좋아 보인다. 평소에 너무 한가하고 조용한 느낌인데 단 3일 동안에 장터, 공연, 놀이공원, 수상스포츠, 육상스포츠, 야외 클럽까지 폭발적으로 즐기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좀 나눠서 간헐적으로 즐기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다가 금방 접었다. 이번 5월이 유난히 맑아서 그렇지, 원래 이런 날씨는 아주 잠깐이다. 곧 6월이 되면 긴 방학과 함께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귀한 맑은 날, 사람들 다 있을 때, 몰아서 실컷 즐기는 이런 기회는 어쩌면 꼭 필요한 연간 행사일 것이다. 한자동맹 거점도시의 역사는 그 명분을 제공한 것으로 이미 충분한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