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4일
성 카시미르의 축일은 3월 4일이다. 리투아니아 어로 카지우카스(Kaziukas)라고 불리는 성 카시미르(St. Casimir)는 1602년에 당시 교황에 의해 성인에 오른 리투아니아의 대공이다. 리투아니아 대공들 중에 가톨릭 성인이 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빌뉴스 대성당 제단 오른쪽으로는 성 카시미르를 기리는 별도의 경당이 있고 매우 정성껏 꾸며져 있다. 그가 성인이 된 날을 축하하는 빌뉴스의 장터 축제가 415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며 2018년 3월에도 사흘간 열렸다. 부활절을 한 달 정도 앞둔 날짜인 데다 3월 초 봄맞이 준비가 한창일 때라 장터 하기 알맞은 축제일이다. 2018년은 4일이 일요일이었고, 금요일부터 3일간 주말을 낀 장터 축제 일정도 딱 맞았다. 빌뉴스 구시가 전역의 길을 따라 줄지어 선 부스들과 곳곳의 공연으로 많은 사람이 몰리는 큰 장날이다. 리투아니아 공화국 100주년이 겹쳐 더욱 성대할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2월 말 유럽의 기록적인 한파가 예상치 못한 추위와 눈을 몰고 왔다. 폭설에 가까운 눈이 봄맞이 분위기로 달아올라야 할 이 축제를 강타했다. 매일 비만 와서 '몇 년째 따뜻한 겨울'을 운운하더니만 뒤늦게 찾아온 한파로 2월 말에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다. 결국 길어진 늦겨울 한파 때문에 녹지 않는 눈을 켜켜이 쌓고 얼려버리는 '옛날 리투아니아식 겨울'이 3월 초에 위용을 떨쳤다. 영하 20도의 새하얀 겨울에 익숙한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2월 말과 3월의 한파는 처음이라고들 했다.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눈이 오고, 영국도 소나기 같은 눈으로 고생을 하는 등 유럽 전역이 뒤늦게 닥친 북극 한파로 뉴스특보를 띄우며 고생을 했다. 한국으로 기울어졌던 북극의 찬 공기가 동유럽으로 기울어지고 상대적으로 북극은 이상 고온이라는 환경 뉴스는 섬뜩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장터축제도 온난화로 인한 기상 악재를 맞았다. 날씨를 고려하여 한두 주 미루자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행사에 참여하는 상인들이 연기 요청을 했는데 정부에서 거절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성 카시미르의 축일은 날짜가 정확히 정해져 있고 그것을 축하하는 의미의 축제이므로 날씨가 어떠해도 미룰 수 없다는 논리였다고 한다. 축제는 끊임없이 내리는 눈과 영하 10도 언저리의 기온을 무릅쓰고 그대로 열렸다. 함께 구경 간 옆방의 일본어 강사 카야코는 그 전 해에도 갔었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사람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다며 걱정을 했었다. 부스마다 사람이 많아서 무슨 물건이 진열되어 있는지 볼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올해는 날씨 덕분인지 때문인지 사람에 치일 정도는 전혀 아니었고 물건도 다 볼 수 있었다. 다만 눈이 계속 오면서 진열한 상품들에 자꾸 덮여 보기가 힘들었다. 날씨 때문에 판매이윤은 고사하고 물건 보호를 위해 부스를 닫아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눈을 털어가며 자리를 지키는 상인들이 대단해 보였다. 워낙 큰 축제고 전통이라서 그런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도 생각보다는 많이 나와 있었다.
주요 품목은 공예품이다. 가게나 공방에서 부스 하나씩 자리를 잡아 가게에서보다 조금씩 낮은 가격에 판매한다. 카야코나 나의 관심사는 적당히 작고 저렴하면서 리투아니아 분위기를 풍기는 선물용 기념품이었다. 리투아니아가 특화하고 있는 린넨은 옷, 가방, 인형, 식탁보, 쿠션, 수건, 벽걸이 등등 부스마다 상품이 다양하다. 목공예품 부스도 계속 나타난다. 금속 공예나 귀걸이,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 부스도 모여 있다. 엄격하지는 않지만 대략 구획을 나누어서 어떤 거리에는 훈제 햄, 염장 생선, 베이커리, 커피와 차, 말린 과일 등 저렴하게 잔칫상을 준비할 수 있는 식품이 즐비하다. 디자인이 새롭고 고급스러운 액세서리나 장식품을 따로 모아놓은 큰 천막도 있다. 유난히 자주 보이는 품목은 부활절에 성당에 가져갈 목적으로 마련하는 말린 꽃 장식이다. 꽃을 말렸다기보다는 말린 줄기나 풀을 단단히 엮고 꽃이나 리본 등으로 장식한 것이다. 부활절 한 주 전인 종려주일에 성당에 가져가서 성수를 받고 다시 집에 가져다 놓는다. 부활절 예식을 위한 것이라지만 사람들은 봄맞이 기념으로 사는 것 같았다. 다양한 모양과 색깔로 예쁘게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새해에 복조리 걸 듯 봄을 시작하는 의미를 담는 게 아닐까 싶다.
온 도시가 모이는 큰 장터 축제라 광장과 빈터에서는 민속음악이나 춤을 위주로 하는 공연도 있었다. 문제는 끊임없이 눈이 오고 있는 영하의 날씨였다. 아무리 겨울 날씨에 도가 튼 리투아니아 사람들이라 해도 천천히 한참 돌아다니거나 서서 공연을 보기는 어려웠다. 우리도 카페로 피신했다가 따뜻한 식당을 찾아 길게 점심을 먹고 바깥 구경은 재빨리 했다. 대성당 광장이나 시청사 광장 모두 성 카시미르 축일에 리투아니아 공화국 100주년을 겹쳐 꾸민 큰 축하 조형물을 세웠다. 민속공연도 있었다. 하지만 날씨 탓에 아쉽게도 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맥주나 전통음료, 빵 튀김 같은 간식류, 볶음이나 구이 요리 등 음식을 파는 부스들에서 최대한 즐거운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전통 공연도 안 추운 척, 눈 안 오는 척, 할 바를 다 했다. 다행히 마지막 날이자 성 카시미르 축일 당일이기도 했던 일요일에는 눈이 그쳐서 그나마 즐기며 마무리를 했으리라 생각된다. 기상이변에 가까운 눈 오는 추운 날씨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도 전통을 지켜 가며 봄맞이를 즐기려는 리투아니아의 의지(?)를 구경한 나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