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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1. 2018

낯선 동네가 우리 동네가 되는 기간

2017년 9월 16일

2016년은 추석이 빨라서 9월 초에 연휴가 있었다. 언니가 어떻게 사는지 보겠다고 친동생이 1주일 정도 카우나스에 와있었다. 그때는 부임 초기라 아직 익숙하지 않고 모르는 게 많아서 함께 헤매기도 하고 초보 여행자같이 돌아다녔다. 그 후 일 년 만에 모든 면에서 많이 익숙해져서 누가 오면 설명도 붙여가며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들을 알게 되었다. 첫 해에 부모님도 일찌감치 한 달 가까이 다녀가셨는데, 그 후 상당 기간은 가족과 함께 걸었던 산책길이나 함께 갔던 식당에 갈 때마다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 작은 도시라 조금만 돌아다녀도 길이 겹치고 같은 식당이나 카페에 계속 가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기억을 공유한 장소는 그 기억이 계속 반복된다. 가족들이 너무 빨리 방문해서 제대로 구경을 못 시켜줬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반면에 미리 추억을 만드는 바람에 이후 긴 겨울로 이어진 혼자만의 시간에 생겼을지 모를 외로움에 대한 예방주사가 되었다. 

 

첫 해에는 서울로부터 몇 차례 소포도 받았다. 겨울옷도 덜 가져왔었고, 딸이 타지에서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을 거라고 걱정하신 엄마가 몇 차례 소포를 보내셨다. 한국에서 첫 소포를 받은 날은 부임한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날이었다. 국제소포로 도착한 박스를 찾으러 중앙우체국까지 가야 했다. 다행히 빌뉴스 공항 근처의 유일한 이케아(IKEA) 매장에서 이런저런 가재도구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사 온 날이기도 했다. 탈부착식 장바구니를 떼어내고 바퀴 틀만 가져가서 박스를 얹고 자유로를 따라 탈탈거리며 끌고 왔다. 늦여름에 부임할 때 가져오지 못한 두꺼운 겨울 옷과 반찬류였다. 엄마가 신경 써서 싸주신 이런저런 물건들을 선물 보따리 푸는 느낌으로 뜯었었다. 겨울옷도 정리하고 소포로 온 먹거리들, 이케아에서 사 온 물건들도 같이 정리하고, 마침 연락이 와서 체류비자 서류까지 이 날 완전히 정리되었다. 이제야 조금 적응과 안정이 된 느낌이었다. 

카우나스에 한국 식당이나 식품점이 없는 점이 제일 아쉽다. 그만큼 소포가 소중했다. 간혹 판매하는 식재료를 발견하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새로운 곳에서 기본적인 생활이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석 달, 안정을 찾으려면 적어도 반년은 필요한 듯하다. 처음 한 달까지는 기초적인 적응이 덜 되어 계속 정신이 없었다. 한 달도 안돼서 찾아왔던 동생의 방문은 그 정신없는 와중의 위로이기도 했다. 우렁각시처럼 방청소를 해주기도 했으니 휴가를 언니 생활보조에 쓴 격이었다. 한두 달 지나 생존의 틀을 겨우 잡은 10월부터 11월에 걸쳐 부모님이 거의 한 달을 지내고 가셨다. 그때까지도 안정이 되지 않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후에야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내 방, 우리 동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적응 덜 된 딸 때문에 부모님이 제대로 구경하거나 즐기지를 못하고 가신 듯해서 아쉬움이 있다. 일 년쯤 지나고 오셨다면 훨씬 잘했을 텐데, 리투아니아까지 또 오시라고는 할 수 없었고 방학 때 유럽 다른 곳들을 같이 여행하자는 제안만 드렸다. 


치안이 좋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리투아니아에서도 생활에 적응하고 안정을 찾는 데 3개월, 넉넉하게 6개월이 걸렸다. 학생 시절 반년 이하로 미국에 두 번 정도 교환학기나 방문 프로그램을 갔을 때는 적응에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한국 사람이 많고 아는 사람도 있었고, 젊은 패기도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한국과 6시간(여름에는 7시간) 시차이기에 서유럽이나 미국보다 한국과 소통하기 쉬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국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스마트폰이 엄청 중요해졌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외로움 예방에는 큰 역할을 했다. 전화도 어렵던 몇십 년 전이었다면 이렇게 멀고 낯선 곳에 혼자 올 수 있었을까 싶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언제든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이런 먼 곳의 장기 체류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거였다.

부모님은 아예 한 달동안 아파트를 구해 머물다 가셨다. 멀리 살게 된 딸이 어떤 동네에서 사는 지 확인을 제대로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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