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6일
2016년은 추석이 빨라서 9월 초에 연휴가 있었다. 언니가 어떻게 사는지 보겠다고 친동생이 1주일 정도 카우나스에 와있었다. 그때는 부임 초기라 아직 익숙하지 않고 모르는 게 많아서 함께 헤매기도 하고 초보 여행자같이 돌아다녔다. 그 후 일 년 만에 모든 면에서 많이 익숙해져서 누가 오면 설명도 붙여가며 편하게 다닐 수 있는 방법들을 알게 되었다. 첫 해에 부모님도 일찌감치 한 달 가까이 다녀가셨는데, 그 후 상당 기간은 가족과 함께 걸었던 산책길이나 함께 갔던 식당에 갈 때마다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 작은 도시라 조금만 돌아다녀도 길이 겹치고 같은 식당이나 카페에 계속 가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기억을 공유한 장소는 그 기억이 계속 반복된다. 가족들이 너무 빨리 방문해서 제대로 구경을 못 시켜줬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반면에 미리 추억을 만드는 바람에 이후 긴 겨울로 이어진 혼자만의 시간에 생겼을지 모를 외로움에 대한 예방주사가 되었다.
첫 해에는 서울로부터 몇 차례 소포도 받았다. 겨울옷도 덜 가져왔었고, 딸이 타지에서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을 거라고 걱정하신 엄마가 몇 차례 소포를 보내셨다. 한국에서 첫 소포를 받은 날은 부임한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날이었다. 국제소포로 도착한 박스를 찾으러 중앙우체국까지 가야 했다. 다행히 빌뉴스 공항 근처의 유일한 이케아(IKEA) 매장에서 이런저런 가재도구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사 온 날이기도 했다. 탈부착식 장바구니를 떼어내고 바퀴 틀만 가져가서 박스를 얹고 자유로를 따라 탈탈거리며 끌고 왔다. 늦여름에 부임할 때 가져오지 못한 두꺼운 겨울 옷과 반찬류였다. 엄마가 신경 써서 싸주신 이런저런 물건들을 선물 보따리 푸는 느낌으로 뜯었었다. 겨울옷도 정리하고 소포로 온 먹거리들, 이케아에서 사 온 물건들도 같이 정리하고, 마침 연락이 와서 체류비자 서류까지 이 날 완전히 정리되었다. 이제야 조금 적응과 안정이 된 느낌이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새로운 곳에서 기본적인 생활이 익숙해지려면 적어도 석 달, 안정을 찾으려면 적어도 반년은 필요한 듯하다. 처음 한 달까지는 기초적인 적응이 덜 되어 계속 정신이 없었다. 한 달도 안돼서 찾아왔던 동생의 방문은 그 정신없는 와중의 위로이기도 했다. 우렁각시처럼 방청소를 해주기도 했으니 휴가를 언니 생활보조에 쓴 격이었다. 한두 달 지나 생존의 틀을 겨우 잡은 10월부터 11월에 걸쳐 부모님이 거의 한 달을 지내고 가셨다. 그때까지도 안정이 되지 않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후에야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내 방, 우리 동네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적응 덜 된 딸 때문에 부모님이 제대로 구경하거나 즐기지를 못하고 가신 듯해서 아쉬움이 있다. 일 년쯤 지나고 오셨다면 훨씬 잘했을 텐데, 리투아니아까지 또 오시라고는 할 수 없었고 방학 때 유럽 다른 곳들을 같이 여행하자는 제안만 드렸다.
치안이 좋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는 리투아니아에서도 생활에 적응하고 안정을 찾는 데 3개월, 넉넉하게 6개월이 걸렸다. 학생 시절 반년 이하로 미국에 두 번 정도 교환학기나 방문 프로그램을 갔을 때는 적응에 별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한국 사람이 많고 아는 사람도 있었고, 젊은 패기도 있었다. 리투아니아는 한국과 6시간(여름에는 7시간) 시차이기에 서유럽이나 미국보다 한국과 소통하기 쉬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국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스마트폰이 엄청 중요해졌다.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외로움 예방에는 큰 역할을 했다. 전화도 어렵던 몇십 년 전이었다면 이렇게 멀고 낯선 곳에 혼자 올 수 있었을까 싶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언제든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이런 먼 곳의 장기 체류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