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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1. 2018

짧은 가을, 인디언 서머

2017년 9월 13일

8월 말부터 이미 서늘해진 날씨는 9월 들어서 연일 비를 뿌리며 빠르게 겨울을 준비했다. 기온이 낮더라도 9월까지는 해만 나면 푸른 하늘과 꽤 쾌청한 가을을 즐길 수 있었다. 근데 그게 해마다 편차가 매우 컸다. 첫 해에는 9월 대부분 눈부신 햇살이 비쳤었는데, 두 번째 해인 2017년 9월은 이미 햇살 비치는 푸른 하늘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두꺼운 구름 아래 자주 비가 오는 날씨로 변해버렸다. 9월 말에 추분이 지나면 급속도로 밤이 길어진다. 국제기숙사에는 한 학기만 교환학생을 오는 학생들이 많은데, 2017년 가을학기 교환학생들은 햇빛을 보는 날이 거의 없어서 내가 다 미안해졌다. 리투아니아 날씨는 밤이나 낮이나 일교차는 크지 않다. 9월 초부터 영상 10도~16도 이상은 올라가지 않는 완연한 가을 기온이다. 언제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서 비가 눈이 될지 몰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짧은 가을이다.

푸른 하늘과 밝은 햇빛은 모든 풍경을 다르게 만든다.

첫가을이던 2016년 9월은 신기할 만큼 화창하고 온화한 날이 많았다. 아침마다 동향 창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선크림을 바르면서 이 정도면 지중해 부럽지 않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걸 인디언 서머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들어본 이름이지만 딱히 실감한 적은 없었는데, 여기서 확연히 느껴졌다. 그 해는 7월과 8월의 소중한 여름에 유난히 흐리고 비가 왔었고, 9월의 인디언 서머가 그 보상이었다고 한다. 사실 2017년 여름도 날씨가 기대만큼 좋지는 않았는데, 9월 인디언 서머마저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 흐리고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한국의 추석이 10월 초의 개천절, 한글날과 겹친 황금연휴가 되어 사촌동생이 놀러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아예 초겨울 여행으로 예상하고 패딩점퍼를 제대로 준비하라고 이야기했다.  

빌뉴스 구시가는 맑은 날이면 관광객으로 붐빈다. 붐빈다고 해도 여전히 여유롭다.

첫 해 9월에는 친동생이 추석에 휴가를 보태 1주일 정도 지내러 왔었다. 처음 부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이었기에 자매가 함께 관광객이 되어 구경을 다녔었다. 그때 북한의 5차 핵실험이 있었고(2016년 9월 9일),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라는 경주의 지진이 큰 뉴스였다. 삼성의 갤럭시 노트 리콜 사태와 출렁이는 증시까지, 한국은 추석 연휴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두 자매가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에 피신이라도 온 것 같았다. 화사하게 비추던 햇살 아래 여유가 넘치는 우리만의 추석이었다. 한국에서는 몸과 마음을 추스를 겨를조차 없는데 멀리서 이렇게 유유자적해도 되는지 송구할 지경이었다. 유럽 한 편의 지방 도시보다 훨씬 잘 사는 한국에서 왜 그렇게 다들 피곤해야 하는지 갑갑한 의문도 던져보았다. 그 피곤함에서 우리만 벗어나 있는 죄책감도 있었는데, 그래도 기회를 얻었으니 열심히 즐겨야 했다. 


리투아니아는 음력 한가위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동생이 왔다는 핑계로 수업만 마치고서 빌뉴스와 트라카이로 구경을 나섰었다. 부임한 지 3주 만이었으니 나도 처음 방문하는 관광객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한국이 추석 연휴인 줄 알기라도 한 듯, 작은 구름만 오가는 맑은 하늘과 다소 더울 정도의 인디언 서머가 일주일 넘게 계속되었다. 파란 하늘과 밝은 햇살 덕분에 스마트폰 사진도 다 엽서 사진 같았다. 대학도시 같은 카우나스도, 수도인 빌뉴스도, 관광지로 깔끔하게 정돈된 트라카이도, 사실은 낡아서 벗겨진 건물이 많다. 햇살이 비치면 옛날 분위기를 살린 '예쁜 중세풍'으로 보이지만, 비가 오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빛깔로 변한다. 전통적인 모습을 지키려는 노력은 아주 최근부터다. 아직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 소련의 점령을 거치면서 무너지거나 소련식으로 고쳐지었던 이력들이 겹쳐 보인다. 소박한 도시들이지만 감추고 있는 이야기가 많다. 어쩌면 그 이야기들은 비 오고 우중충한 분위기에서 더 느낌이 살아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처음 오는 관광객들에게는 맑은 날씨가 좋은 게 당연하다. 여름의 끝을 잡고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에게는 선물 같은 햇살이 낡은 관광지들의 첫인상을 화사하게 남겨주었다. 

빌뉴스 구시가 골목의 이모저모. 흐린 날엔 우중충하다가도 햇살이 비치면 화사하게 살아난다.

빌뉴스가 수도이고 제일 크지만 한국식 여행 패키지였다면 구시가지 관광에 반나절도 안 걸렸을 듯한 작은 도시다. 한국어로 된 여행책자도 없다. 책에 써진 대로 꼭 봐야 하는 코스 같은 게 없다. 오히려 여유를 더욱 즐기는 효과가 있었다. 우리 자매는 여행 갈 때마다 먼저 관광책자를 섭렵한 뒤 이 잡듯 돌아다니면서 목표를 달성하는 유형이었다. 하지만 리투아니아는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여유롭게 기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행 정보가 넘쳐나던 유명 도시 관광과는 다른 색다른 경험이었다. 예상 밖의 볼거리를 발견하고, 기대했던 것과 다른 느낌을 받고, 예약도 예매도 없이, 영업을 하는지 문고리를 당겨봐야 알고, 물어물어 보고 듣고 먹는 관광이었다. 덜 치열하면서도 더 모험하는 긴장감이 있었다. 저녁 즈음에는 몸과 마음이 만족스럽게 피곤해졌다. 


해가 나는 날이 귀하다 보니 조금 맑고 해난다 싶은 날이면 음식점이나 카페엔 해가 드는 바깥쪽 자리가 분주하다. 가게들도 최대한 야외에 많은 테이블을 깔고 저녁까지 자리를 확보한다. 맥주 한잔만 놓고도 한참씩 앉아서 인디언 서머를 즐기는 사람들은 곧 다가올 긴 겨울을 조금이라도 더 미루고 여름을 즐기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우리도 자매끼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리투아니아 맥주를 놓고 분위기를 내보았다. 리투아니아 맥주는 독일이나 체코, 벨기에 맥주처럼 딱히 기억에 남을 만한 맛은 아니다. 흉은 아니지만 한국 맥주와 좀 더 비슷한 느낌이다. 그게 이곳 감자요리들과는 정말 잘 어울린다. 여름을 포함해 날씨가 좋아지는 5월부터 9월을 제외하면 밖에서 맥주 마시는 일은 일곱 달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가장 강력한 안주가 된다. 

빌뉴스는 야경도 소박하다. 그래도 주요 장소들은 조명이 잘 밝혀져 있다.
빌뉴스 늦여름 하늘의 열기구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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