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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0. 2018

일상의 빈칸 즐기기

2017년 9월 6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시작한 일과 생활, 맞닥뜨린 큰 과제는 갑자기 남아도는 듯 넘치는 여유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였다. 일상에 갑자기 빈칸이 잔뜩 생겼다. 그걸 비워두고 즐긴다는 게 낯선 환경만큼이나 낯설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하면서 '9 to 6'에 출퇴근 지옥철, 야근 등등 틈 없이 살다가 이곳 대학에 객원교수로 파견을 왔다.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한국학 객원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카우나스의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교(VMU) 동아시아 학부에 출근했다. 9월이 개강에 맞추어 늦여름이던 8월 중순에 난생처음 와보는 리투아니아에 도착했다. 발트 3국, 그중 리투아니아, 빌뉴스라는 수도 이름도 생소한데 파견된 대학은 두 번째 도시인 카우나스였다. 핀란드를 경유해서 도착한 빌뉴스 국제공항은 한국의 어느 지방 공항보다도 작아 보였다. 거기서 다시 차로 한 시간 반쯤 달려 도착한 카우나스는 유리로 코팅한 고층빌딩 같은 건 하나도 없는 아담한 도시였다. 유럽의 많은 대학들이 그렇듯 VMU는 캠퍼스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도심 곳곳에 흩어져 있다. 작은 도시였지만 학생들이 많아서 젊은 분위기였다. 구시가지는 예쁜 중세 유럽 분위기가 나고, 중심가는 러시아와 소련 지배의 영향이 묻은 낡은 근대식 거리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리모델링을 겸한 개발이 한창인 작은 도시는 넓은 공원과 강, 숲, 호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국학 객원교수의 의무는 한 학기 2과목 이상 수업이었다. 대략 2.5개 정도 수업을 하게 되었다. 한 수업이 평균 주당 3시간이니 한 주에 총 6~8시간가량 수업을 하고 나면 나머지 시간은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연구센터에 나가기도 했고 학생을 만나거나 특별한 행사나 회의도 있었지만, 모두 선택과 조정이 가능한 일정이다. 2016년 9월 첫 학기 때는 두 과목 수업을 담당했는데, 두 수업이 모두 수요일에 몰려 있었다. 학교에서 짐짓 배려해서 하루에 몰아준 것 같았다. 첫 학기였으므로 한국 관련 내용들을 영어로 전부 정리하고 PPT로 만들고 연습까지 하면서 준비에 시간과 공을 많이 들였었다. 주초 며칠 동안을 열심히 준비해서 수요일에 수업을 하고 나면 쭉 주말 같았다. ‘월화수토토토일’이었다. 수업 준비 부담으로 그 긴 주말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던 생활에 비하면 자유롭게 조절 가능한 시간이 엄청나게 많아진 셈이었다.  

국제기숙사 꼭대기층의 숙소에서 내다보이는 풍경은 날씨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두 번째 학기였던 봄학기에는 혼자서 온전히 가르치는 수업 하나와, 리투아니아 동료 교수와 분담해서 진행하는 수업이 두 개 배정되었다. 세 수업이 모두 겹쳤던 주간에는 정신이 없었지만, '월화수토토토일' 느낌은 비슷했다. 자유로운 시간을 잘 활용해볼 생각으로 리투아니아어 초급 과정을 수강해 봤다. 매주는 아니었지만 가능한 대로 주말마다 '대도시'에 나들이 가는 느낌으로 빌뉴스에 있는 강 선교사님 댁에 예배도 볼 겸 방문하기 시작했다. 일 년을 한 바퀴 돌아 세 번째 학기가 되면서는 했던 강의들이 반복되면서 수업 준비 부담도 줄어들었다. 어쩌다 보니 월요일과 화요일에 수업이 배정되어 시간표만으로 본다면 '월화토토토토일'이 되었다. 한국에서 이 정도면 황금연휴다. 3박 4일 정도만 휴가가 주어져도 동남아 정도까지는 너끈히  빡빡한 여행 일정을 소화하는 게 한국적인 시간 활용이다. 버스나 항공 연결이 편리한 도시들로 주중 여행도 몇 번 해봤다. 매주 그럴 수는 없는지라, 이 시간들을 채우고 즐기기 위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기숙사 서쪽 창에서는 여름이면 긴 석양이 밤늦게까지 이어진다.

바쁜 한국사회에 익숙해 있던 탓인지, '한창 일할 나이'인데 이렇게 여유를 즐기자니 왠지 죄스러운 기분까지 들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또래 친구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장에서 시달리고, 퇴근은 곧 육아로 이어지는 또 다른 출근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내 생활은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숨 돌릴 틈 없이 살아오신 부모님 세대나 건강 챙길 새도 없는 직장맘 또래들에 비하면 바쁘다는 말을 꺼낼 처지가 아니었다. 결혼을 안 했으니 남편도 아이도 없다. 가방끈을 늘리느라 학교에 오래 있었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을 따라 지옥철에 시달린 직장 생활은 사실 몇 년 안 된다. 이곳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워졌고 한국에서 너무 멀어 모임이나 경조사에서도 자동 제외되었다. 카우나스 생활은 전에 상상해본 적 없을 만큼 빈칸이 많았다.

시간이 남는다고 느껴질 때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이 산책이었다. 날씨가 중요하다는 변수가 있지만.

처음에는 그 빈칸들이 그저 신기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상황 자체가 신기해서 채우지 않은 채 비워 두고 그 심심함까지 즐겼다. 심심함을 느낀 적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생소하기까지 했다. 두 번째 학기가 되어서야 좀 채워가면서 즐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채워야겠다는 막연한 의무감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늘 무엇인가 목표를 가지고 정진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일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느껴지는 또래들의 치열한 삶, 엄청나게 피곤하면서도 쉬지 않고 무엇인가 성취하고 있는 모습에 뭔가 반성을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한국처럼 바쁘고 치열하게 살게 되지는 않았다. 여행하듯 살아보자는 당초의 결심도 있었지만, 이곳에서 그런 숨 가쁜 삶은 가능하지도 않았다.

숙소 맞은편의 작고 한적한 공원은 원래 카우나스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지금은 민족적 영웅들을 기리는 조형물과 몇몇 비석들만 남아있다.

빈칸을 채우자고 생각은 했지만 이 휴식 같은 생활을 즐기자는 결심은 접지 않기로 했다. 심심함을 줄이고 생활을 다채롭게 하는 선에서, 운동과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고 독서를 늘리는 것으로 빈칸 즐기기를 시작했다. 전공 서적이나 수업 자료만 보던 시간에 소설이나 수필 읽기를 늘렸다. 전공이나 일과 무관하게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한심했다. TV 없이 살아 보니 매체에 노출되는 빈도가 줄면서 음악이나 책을 더 찾게 되었다. 물론 노트북, 스마트폰, 태블릿까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뉴스도 드라마도 실시간 가능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를 핑계로 넷플릭스에 가입해서 동서양 프로그램들을 눌러보기 시작했다. 빈칸을 잘 채우고 즐기는 데에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예전에 놓친 드라마나 영화도 있고 간혹 흥미로운 것들을 건지기도 했다.


물론 가장 좋은 빈칸 즐기기는 짧은 여행이다. 한 도시마다 하루나 반나절 만에 번개같이 중요 관광지를 찍고 이동하는 한국식 여행패턴을 벗어났다. 한곳에 집중적으로 머물면서 며칠씩 보고 오는 여행은 저비용으로 가장 확실한 빈칸 채우기를 해준다. 오자마자 벽에 붙여 둔 유럽 지도에 가본 곳들을 형광펜으로 긋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배낭여행 때 유명한 몇몇 도시에 발도장을 찍었지만, 오밀조밀하고 다양한 유럽은 갈 곳이 넘쳤다. 리투아니아 내에서도 때에 따라 펼쳐지는 행사나 축제도 많고, 볼 만한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생각보다 많았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나 숨어 있는 이야기가 있고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 천천히 보고 느끼는 게 생각보다 꼼꼼한 계획이 필요했고, 작정하고 보고 느끼려니 금방 빈칸이 모자라게 되었다. 보고 느끼는 것들을 소화하기 위해 기록도 잘해보려고 노력을 했다. 기록과 정리 또한 빈칸 즐기기의 큰 부분이다.

이른 아침에 언덕 위 큰 공원도 산책을 가봤다. 여름에도 선선한 아침에 너무 큰 공원은 살짝 으스스할 정도로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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