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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2. 2018

언제나 긴 휴가를 기대하는 일상

2017년 9월 23일

9월 개강 후 한 달쯤 지난 시점, 다들 겨울방학에 무엇을 할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 유럽의 겨울방학은 여름에 비해 매우 짧기는 하다. 학교마다 다른데 VMU의 경우 학사일정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12월 말에 거의 끝난다. 2월에 시작하는 봄학기 전까지 1월이 방학이다. 직장인들도 성탄절과 새해 첫 날을 끼고 한두 주는 휴가로 보낸다. 거의 석 달 전부터 그때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묻는 인사들이 오간다. 여행 계획이 없다면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게 계획이고 그게 인사 내용이다. 여행하려는 사람들은 예약과 구체적인 계획들을 세운다. 나는 한국 방문을 확정하고 있었지만, 앞뒤로 남는 날들도 허송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고민을 시작했다. 

저가항공 라이언에어(Ryanair)를 잘 이용하면 파격적인 가격으로 다닐 수 있다.  

여행 계획은 언제나 행복한 고민이다. 막상 여행할 때보다도 계획을 세우면서 기다릴 때가 더 즐겁다는 이야기도 한다. 동유럽과 북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놓인 리투아니아의 겨울은 상당히 우울하므로 긴 겨울을 잘 보낼 궁리가 중요하다. 한국 교환학생들은 노르웨이나 핀란드에 오로라를 보러 간다거나, 최근 한국에서 인기 방문지가 된 아이슬란드에 간다며 빙하와 오로라를 모두 노리기도 한다. 북유럽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 추운 겨울에 더 추운 그곳이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로라가 보고 싶기는 했지만 스키나 개썰매 같은 레저는 별로 당기지 않아서, 비싼 북유럽은 겨울 여행지 우선순위에서 멀어졌다. 리투아니아보다 따뜻하고 적어도 진눈깨비보다는 비가 올 만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겨울은 유럽 곳곳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여행으로 귀결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서 발트해를 볼 수 있는 클라이페다 맞은편 사구 해안. 소련 시절에는 연방 차원의 대대적인 여름 휴가지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오셨을 때 아무도 없는 가을날 방문.

연말이 지나면 얼마 후부터 4월의 부활절 휴가를 고민하고, 그 후에는 6월부터 길게 이어지는 여름 계획을 세우느라 다들 꽤나 고심을 한다. 고민이라기보다는 행복한 상상에 가까운 휴가 계획을 하다 보면 밤늦게 졸리던 시간도 휙휙 지나가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웬만한 교수나 학생, 직장인들이 모두 주기적으로 다가오는 긴 휴가를 계획하고 기대한다. 한국과 크게 다른 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는 엄두를 못 낼만큼 긴 휴가가 적어도 여름에 크게 한 번, 겨울에도 어느 정도 한 번은 가능하다. 그걸 기대하며 그 사이의 일상을 지낸다. 일상생활 속에서 긴 휴가를 기대하며 버틴다고 한다. 애초에 야근이나 주말근무가 거의 없고 서열 관계도 훨씬 유연해서 한국보다 업무 스트레스가 훨씬 적다. 꼭 긴 휴가가 아니더라도 항상 휴가 사용이 자유로워서 직장 때문에 가족관계나 건강에 타격을 입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에 더하여 긴 휴가가 주기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니, 계획도 미리미리 하면서 기대하는 즐거움을 한참 전부터 누리게 된다. 


한국은 평소에도 근무환경에서 오는 과로와 스트레스가 훨씬 심하고 휴가 사용도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긴 휴가가 주기적으로 온다는 보장도 없다. 여름휴가도 길지 않고, 상황에 따라 들쭉날쭉하고, 그날이 임박할 때까지 진짜 휴가를 가도 되는 것인 지 확실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간혹 달력을 미리미리 따져서 황금연휴라는 흔치 않은 기회가 생겨도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확정하고 계획을 짜며 기대하는 즐거움을 충분히 누리기는 어렵다. 직장에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걸 정말 '문화적인 차이'나 '한국적 습성'으로 규정하고 한숨만 쉬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힘들다. 과로와 시간 결핍으로 인한 부작용이 한계에 이르고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워라밸' 같은 신조어도 생겼다. 위아래 없이 획기적으로 제도와 문화를 바꾸어볼 결심이 있어야 한다.

카우나스-빌뉴스 간 운행하는 기차 / 확장과 보수를 반복하고 있는 빌뉴스 국제공항 전경
발트에서 도시간이나 국가간 육로 이동은 기차보다는 버스다. 새로 단장한 카우나스 버스터미널과 비교적 새 버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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