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10일
10월부터 이미 겨울 날씨나 다름이 없다. 9월도 비가 많은 가을이었는데, 10월부터 쏜살같이 가을을 보내버리고 초겨울에 돌입하였다. 첫 해에는 이틀에 한 번 비가 온다고 느꼈었다. 두 번째 겨울을 앞둔 2017년 가을은 나흘에 한 번 정도 비 안 오는 날이 있을까 말까 했다. 인디언 서머도 없다고 모두 한탄하는 가운데 속절없이 추분이 지났다. 지난 몇 년간 겨울이 별로 춥지 않고 눈도 많이 안 와서 온난화를 실감했는데, 이번 겨울은 비가 계속 오는 걸 보니 예전처럼 춥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 되는 거 아니냐는 두려움 섞인 예상도 들렸다. 부임할 때 겁먹었던 것과 달리 첫겨울에는 강력한 한파까지는 아니어서 두꺼운 모자나 목도리를 별로 쓰지 않고 넘어갔는데, 방한 용품이 더 준비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한국은 추석이 지나도 여전히 덥다는데 벌써 모직코트냐 패딩이냐 고민하고 있자니 억울하기도 했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있자니 그것도 억울했다. 비가 그치거나 약해졌을 때 산책이라도 나가보면 추워서 후회가 되고 또 억울하다. 억울해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나갔다. 비가 오면 거리가 한산한데, 꼭 비가 와서 한산한 게 아니라 원래 한산한 거고, 가끔 비가 안 오는 날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나와 돌아다닌다고 보는 게 맞다. 비가 오는 게 일상이고, 겨울엔 눈이 일상이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도로 공사는 도로 공사 대로, 건물 보수는 건물 보수대로 일하는 데는 상관이 없었다. 날씨에 연연했다가는 아무 일도 진척되지 않았을 거다.
인디언 서머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고 완연한 겨울색이 들기 시작했다. 겨우내 계속할 기세로 여전히 천천히 진행 중인 곳곳의 도로공사와 건물 보수는 좀 신기하기도 했다. 처음 왔을 때부터 카우나스는 줄곧 공사판이었다. 자유로, 구시가지, 좀 외곽 동네들까지도 도로를 새로 깔고 낡은 건물을 고치고 있었다. 집 근처에 흔히 소보라스(soboras)라고 부르는, 과거 러시아 정교회당이었다가 가톨릭 성당으로 바뀐 큰 성당이 있다. 정식 이름은 성 미카엘 성당인데 모양 때문에 정교회당을 뜻하는 소보라스로 더 많이 불린다. 그 주변 광장도 보도블록을 다 바꾸고 벤치와 놀이터를 설치하는 미화 사업을 작년 늦여름부터 눈 오는 겨울까지 했다. 웬만한 눈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사가 계속되었다. 속도가 한국보다 훨씬 느리지만 유럽 치고는 꽤 신속하게 진행되는 편이다. 주말에는 확실히 멈추지만 겨울에 눈이 온다고 멈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소보라스 주변 미화사업은 그 긴 겨울을 다 지나고 3월에 눈이 점점 녹을 때 끝났다. 그리고 여름이 다 되어갈 즈음 소보라스와 자유로의 보행자 도로가 말끔하게 단장이 되었다. 그 공사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자유로 중간부터 곳곳의 건물들에 포장을 둘러치고 보수공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공사판이 끼어 있지 않은 사진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 건물이 끝나면 저 건물이 시작했다. 자유로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길도 전체를 뜯고 다시 포장했다.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죄다 엎어놓아서 찻길로 걸어야 했다. 지하의 파이프 공사까지 다 하는 듯했고, 학기말까지 긴 기간 계속되었다.
지금 학교 본관으로 쓰고 있는 새 건물도 최근에 완공한 새 빌딩이다. 아시아센터도 자유로 가까이에 있는 국제처 건물에 임시로 있다가 새 건물로 입주했다. 별안간 커다란 유리창과 카드로 잠기는 유리문, 자동문, 새 엘리베이터 등 한국의 여느 대학에서도 쉽지 않은 모던한 시설을 누리게 되었다. 새 본관을 제외하면 거리 곳곳의 학교 건물들 대부분은 옛날 건물, 즉 소련식의 튼튼해 보이는 짙은 색 빌딩들이다. 드디어 순차적으로 리모델링이 시작되었다. 그에 비해 기하학적 디자인까지 가미하여 초현대식으로 유리를 많이 사용한 새 본관은 딴 세상 같았다. 같은 거리에 있는 낡은 소련식 건물들 사이에서 너무 눈에 띄지 않으려 했는지, 살짝 안쪽으로 들여 지어서 덜 돌출되고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작년에 개관 및 입주 기념 파티를 하고 나서도 세부적인 내부 마무리나 집기 설치, 사무실들의 입주는 겨울 내내 계속되었다.
새로 짓는 건물들은 최대한 아래위로 넓게 트이고, 채광이 잘 되도록 개방된 공간으로 만든다. 학교 건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의실 문이나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훤히 보이는 경우도 많다. 중앙이 통으로 뚫린 아래층에 도서관이 있어서 책이며 열람실이 몽땅 드러난 구조는 좀 황당했다. 이곳 도서관은 결코 조용한 공간이 아니다. 소리가 더 잘 울리게끔 듯 뻥 뚫린 구조 아래 학생들의 모임이나 토론이 꽤 자유롭다. 식당은커녕 매점은 없고 자판기뿐이라는 점은 당황스러우면서 아쉬운 특징이다.
냉전 이후 발전을 시작한 후발주자여서 공사나 사업이 비교적 추진력 있게 진행되는 편이다. 한국에 비하면 너무 느리지만 서유럽에 비하면 훨씬 빠르다. 꾸준하게도 겨울 추위나 눈에도 구애받지 않고, 주민의 통행 불편을 크게 배려하지 않고 공사를 진행한다. 이곳 사람들은 변화를 반기고, 속도감을 기뻐한다. 내가 보기엔 공사 하기에는 비나 눈이 너무 많이 오는데도 계속 진행되고, 통행이 지나치게 불편한데도 별다른 불만이 제기되지 않는 것 같았다. 로마처럼 땅만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지역도 아니니 별다른 제약도 없다. 물론 도시 경관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구시가나 자유로에서 도로변 건물들은 중세나 근대 초기 느낌을 살리도록 규제를 한다고 한다. 그 외에는 보존보다는 새롭게 만드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한국의 80년대와 비슷한데, 지금의 한국도 공사가 잦으니 익숙한 풍경이기도 하다. 빛의 속도로 변하고 그 변화를 채 느끼기도 전에 또 변하는 한국에 비하면, 이곳의 보도블록 교체는 느림의 미학마저 있어 보인다. '유럽'하면 떠오르는 지극히 정적인 분위기를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공사판을 방불하는 카우나스의 모습이 살짝 서운할 수도 있다. 매일같이 진행되는 공사를 보면 여기도 한국처럼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변화하려는 동력이 있고, 그 안에서 일상도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채워진다.
긴 겨울에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눈만 쌓여있을 것 같아도 바쁜 일상과 변화와 발전은 계속되는 것이다. 날마다 급변하는 한국 뉴스를 보느라 여기 뉴스에는 눈길이 잘 못주었지만 여기도 날마다 화제가 있다. 사람 사는 동네는 다 비슷한 법이다. 의회 선거가 있으면 모두가 정치 이야기를 한다. 러시아의 군사훈련과 그에 대응하는 나토 군의 훈련이 톱뉴스가 되기도 한다. 유명인의 스캔들,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 학교의 가장 유명인사였던 철학과의 레오니다스 돈스키스(Leonidas Donskis) 교수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충격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수업에서 학생이 알려줘서 알았는데, 이미 매체를 통해 널리 퍼진 소식이었다.
영어로 나오는 주요 뉴스라도 보면서 리투아니아와 발트 소식을 따라가려고 노력을 하긴 했다. 발트지역 전체를 다루는 발틱 타임스(The Baltic Times)의 리투아니아 섹션이라도 가끔 보면 어느 정도 중요한 뉴스는 따라갈 수 있었다. 물론 북한 핵, 촛불 시위 같은 대형 뉴스가 매일같이 터지던 한국에 비하면 놀랄 게 별로 없는 뉴스지만, 한국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것이지 리투아니아가 유난히 더 정적인 것은 아니다. 관심을 접고 우아하게 눈 내리는 창 밖만 보면서 겨울의 리투아니아는 참 고요하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온다고 해서 사람 사는 생활의 속도가 늦춰지거나 별 일이 안 일어나는 아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속도로 끊임없이 계속된 공사들이 종종 그걸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