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김유리 Mar 15. 2018

긴 겨울을 앞둔 변함없는 일상

2017년 10월 10일

10월부터 이미 겨울이 왔다. 9월도 비가 많은 가을이었는데, 10월부터 쏜살같이 가을을 보내버리고 초겨울에 돌입하였다. 작년에는 이틀에 한 번 비가 온다고 느꼈었다. 올해는 나흘에 한 번 정도 비 안 오는 날이 있을까 말까 하다. 올해는 인디언 서머도 없다고 모두들 한탄을 했다. 지난 몇 년간 겨울이 별로 춥지 않고 눈도 많이 안 왔다는데, 비가 계속 오는 걸 보니 올해는 예전처럼 춥고 눈이 많이 오는 겨울이 될 것 같다는 예상도 들린다. 작년에 강력한 겨울 추위가 없어서 두꺼운 모자나 목도리를 별로 쓰지 않고 넘어갔는데, 올해는 방한 용품이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주말에 빌뉴스 산책을 즐기곤 했는데, 긴 겨울은 빌뉴스가 더 춥고 습하다.

한국은 추석이 지나도 여전히 덥다는데 벌써 코트냐 패딩이냐 고민하고 있자니 억울하기도 하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있자니 그것도 억울하다. 비가 그치거나 약해졌을 때 산책이라도 나가보면 추워서 후회하면서 또 억울하다. 억울해하면서도 기회만 되면 나간다. 비가 오면 거리가 한산한데, 비가 와서 한산한 게 아니라 가끔 비가 안 오는 날 사람들이 굳이 열심히 나와 다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비 오는 게 일상이고, 겨울엔 눈이 일상이다.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도로 공사는 도로 공사 대로, 건물 보수는 건물 보수대로 일하는 데는 날씨가 상관이 없다.

소보라스 앞 잘 정비된 자유로 초입은 좋은 산책로다.

인디언 서머의 기대도 물거품이 되고 완연한 겨울색이 들기 시작하는데, 겨우내 계속할 기세로 천천히 하고 있는 도로공사와 건물 보수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왔을 때부터 카우나스는 줄곧 공사판이었다. 자유로, 구시가지, 좀 외곽 동네들까지도 도로를 새로 깔고 낡은 건물을 고치고 있었다. 소보라스(soboras)라 부르는 집 근처 큰 성당 주변 광장도 보도블록을 다 바꾸고 벤치와 놀이터를 설치하는 미화 사업을 작년 늦여름부터 눈 오는 겨울까지 했다. 웬만한 눈발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사가 계속되었다. 속도가 한국보다 훨씬 느리지만 유럽 치고는 꽤 신속하게 진행되는 편이다. 주말에는 확실히 멈추지만 겨울에 눈이 온다고 멈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소보라스 주변 미화사업은 계속 진행중

소보라스 주변 미화사업은 올해 3월 눈이 점점 녹을 때 끝났고, 여름 즈음 소보라스와 자유로의 보행자 도로가 말끔하게 단장이 되었다. 그러기 무섭게 자유로 곳곳의 건물들에 포장을 둘러치고 보수공사를 진행 중이다. 공사판이 끼지 않는 사진을 찍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 건물이 끝나면 저 건물이 시작한다. 자유로에서 학교로 올라가는 길도 전체를 뜯고 다시 포장했다. 이쪽저쪽 할 것 없이 죄다 엎어놓아서 찻길로 걸어야 했다. 파이프 공사까지 다 하는 듯했고, 학기 중에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지금 학교 본관으로 쓰고 있는 새 건물도 작년 이맘때 완공한 새 빌딩이다. 아시아센터도 자유로 가까이에 있는 국제처 건물에 임시로 있다가 새 건물로 입주했다. 별안간에 커다란 유리창과 카드로 잠기는 유리문, 자동문, 새 엘리베이터 등 한국의 여느 대학에서도 쉽지 않은 모던한 시설을 누리게 되었다. 새 본관을 제외하면 거리 곳곳에 있는 학교 건물들 대부분은 옛날 건물, 즉 소련식의 튼튼해 보이는 짙은 색 빌딩들이다. 리모델링에 들어간 것도 있다. 기하학적 디자인까지 가미하여 초현대식으로 유리를 많이 사용한 새 본관은 딴 세상 같다. 같은 거리에 있는 낡은 소련식 건물들 사이에서 너무 눈에 띈 탓인지, 살짝 안쪽으로 들여 지어서 덜 돌출되고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작년에 개관 및 입주 기념 파티를 하고 나서도 세부적인 마무리나 다른 사무실들의 입주는 겨울 내내 계속되었다.

거리를 걷다가 새로 지은 학교 본관에 가면 갑자기 시간이동이라도 한 듯하다

새로 짓는 건물들은 최대한 아래위로 넓게 트이고, 채광이 잘 되도록 개방된 공간으로 만든다. 학교 건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의실 문이나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경우도 많다. 중앙이 통으로 뚫린 아래에 도서관이 있어서 책이며 열람실이 훤히 드러난 구조는 좀 황당했다. 이곳 도서관은 조용한 공간이 아니다. 소리가 더 잘 울리라는 듯 뻥 뚫린 구조 아래 학생들의 모임이나 토론은 꽤나 자유롭다. 식당은커녕 매점은 자판기뿐이라는 점도 당황스러우면서 아쉬운 특징이다.

흉물스런 소련시절 건물을 헐어내고 현대식 유리빌딩이 올라간다.

냉전 이후 발전을 시작한 후발주자여서 공사나 사업이 비교적 추진력 있게 진행된다. 서유럽에 비해 빠르게, 겨울 추위나 눈에도 구애받지 않고, 통행 불편에 크게 배려하지 않고 공사가 진행된다. 로마처럼 땅만 파면 문화재가 나오는 지역도 아니니 별다른 제약도 없다. 물론 도시 경관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구시가나 자유로에서 도로변 건물들은 중세나 근대 초기 느낌을 살리도록 규제가 된다고 한다. 그 외에는 보존보다는 새롭게 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사람들도 변화를 반기고, 속도감을 기뻐한다.

폐허에 가까운 옛 러시아군 주둔지는 공장이나 상점으로 개조 중이다.

한국의 80년대와 비슷할 것 같은데, 지금의 한국도 공사가 잦으니 오히려 익숙한 풍경이다. 빛의 속도로 진행되어 변화를 채 느끼기도 전에 또 변화하는 한국에 비하면, 이곳의 보도블록 교체는 느림의 미학마저 있어 보인다. 그래도 '유럽'하면 떠오르는 정적인 분위기만 기대한다면, 공사판을 방불하는 도시의 모습은 살짝 서운할 수도 있다. 매일 진행되는 공사를 보면 여기도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력이 있고, 그 안에서 일상도 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채워진다.

 

소련식 건축의 대표격인 우체국도 곧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긴 겨울에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게 눈만 쌓여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바쁜 일상과 변화와 발전은 계속된다. 날마다 급변하는 한국 뉴스를 보느라 여기 뉴스에 느린데, 여기도 날마다 화제가 있다. 의회 선거가 있으면 모두가 정치 이야기를 한다. 러시아의 군사훈련과 그에 대응하는 나토 군의 훈련이 톱뉴스가 되기도 한다. 유명인들의 스캔들,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기도 한다. 작년 이맘때 학교에서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철학과의 레오니다스 돈스키스(Leonidas Donskis) 교수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충격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수업에서 학생이 알려줘서 알았는데, 이미 매체를 통해 널리 퍼진 소식이었다.

네무나스 강변 산책은 아주 춥지만 않으면 흐려도 좋다. 뉴스 보다가도 산책 나오면 무념무상.

영어로 나오는 주요 뉴스라도 보면서 나도 리투아니아와 발트 소식을 따라가려고 노력 중이다. 발트지역 전체를 다루는 발틱 타임스(The Baltic Times)의 리투아니아 섹션이라도 가끔 보면 어느 정도 중요한 뉴스는 따라갈 수 있다. 물론 북한 핵, 촛불 시위 같은 대형 뉴스가 매일같이 터지던 한국에 비하면 놀랄 거라곤 별로 없는 뉴스지만, 한국이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것이지 리투아니아가 유난히 더 정적인 것은 아니다. 관심을 접고 우아하게 눈 내리는 창 밖만 보면서 겨울의 리투아니아가 얼마나 고요한 지만 되새길 수도 있다. 하지만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이 온다고 해서 사람 사는 생활의 속도가 늦춰지거나 휴식이 길어지는 건 아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속도로 끊임없이 계속된 공사들이 종종 그걸 일깨워 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우나스 도심의 미국식 쇼핑몰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