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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6. 2018

리투아니아 첫 공화국 대통령 궁

2017년 10월 16일

카우나스에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즉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전간기'에 처음 수립한 독립공화국의 대통령 궁으로 쓰인 저택이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근대식 자유로와 중세 구시가의 경계 즈음에 작은 공원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산책길에 매번 지나친다. 장기 체류자의 특성상 가까이 있는 이런 박물관일수록 서두르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게 마련이다. 2016년 가을 부모님이 방문하셨던 첫 주말, 날씨가 좋아 구시가까지 천천히 산책을 나섰을 때 같이 대통령 궁 박물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사람이 없어서 개관 시간인지 아닌지 문을 열어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카우나스는 전간기 독립 리투아니아의 임시수도였다. 그 20여 년간의 소박한 대통령궁.

빌뉴스에 있는 현재의 리투아니아 대통령 궁은 빌뉴스 대학 옆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좁은 중세 분위기의 구시가지 골목 사이로 찾아가야 하긴 하지만 꽤 규모가 크다. 그에 비해 카우나스의 이 대통령 궁은 너무 소박해서 궁이라는 명칭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2층 저택이다. 그래도 카우나스를 안내하는 가이드들은 상당한 무게를 두어 이 궁을 소개한다. 리투아니아 역사상 언제나 정치의 중심은 빌뉴스였다. 그런데 1차 대전이 끝나고 리투아니아를 비롯하여 발트 지역 국가들이 처음으로 근대 국민국가로서 독립을 하고 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수도는 이곳 카우나스였다. 당시 전후 처리를 하면서 빌뉴스 지역이 폴란드에 포함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920년대 사용할 당시의 대통령궁 모습.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중세 내내 긴밀한 관계를 이어왔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Commonwealth)을 이루었다. 18세기 말 세 강대국(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3차에 걸친 그 유명한 폴란드 분할 이후로 리투아니아와 발트 지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 요구는 지속적으로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다가 러시아 치하에서 1차 대전을 맞았고, 거기에 볼셰비키 혁명이 겹쳤다. 러시아의 지배력이 약화되면서 독일이 전략적으로 접근하였고, 1차 대전 이후 연합국의 승리와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빌뉴스를 폴란드가 차지했기에 리투아니아는 카우나스를 임시 수도로 삼고 독립공화국의 입지를 다지고자 노력했다. 긴 협상을 통해 1939년에 폴란드로부터 빌뉴스를 반환받았으나, 1940년에 바로 소련에 침공을 당했으므로 기쁨은 찰나에 가까웠다.

직원 아주머니가 사진엽서를 여러 장 주셨다. 가장 왼쪽이 스메토나 대통령.

박물관 1층은 전간기 대통령들과 주요 인사들, 정치, 경제, 사회적 발전상을 설명해 놓았는데, 영어 설명은 별로 없어서 세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리투아니아의 박물관들이 대부분 영어 설명을 잘해놓는데, 이곳은 조금 의외였다. 외국인이 들어와서 관람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박물관 직원 아주머니들은 설명해주려는 성의가 엄청났으나 영어를 잘 못해서 안타까워했다. 기본적인 내용이나 큰 그림은 몇 마디라도 열심히 설명해주고, 사진엽서를 여러 장 가지라며 나눠주기도 했다. 20년간 있었던 세 명의 대통령과 당시 집무실, 연회장 사진들이었다. 선출직 대통령제였던 공화국 시기 20년간 대통령이 3명이면 너무 적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초대 대통령 안타나스 스메토나(Antanas Smetona)는 독립영웅이었고 1919년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체계를 갖추고 다시 시행된 그다음 해 1920년의 선거에서 다른 사람이 선출된다. 1926년에 또 다른 대통령까지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만, 그 해 말에 군사쿠데타로 초대 대통령이었던 스메토나 체제로 바뀐다. 2차 대전 발발 직후 소련이 침공한 1940년까지 스메토나 대통령의 권위주의 통치가 지속되었다. 어딘지 낯이 익은 진행이라 쓴웃음도 나왔다.

정원에 1930년대의 카우나스 사진전이 몇 달 동안 있었다.

쿠데타와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논의는 있겠으나, 그 시기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위태로운 국제정세 속에서도 다방면에 걸쳐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는 것만은 모두가 동의한다. 대통령 궁 앞 작은 정원에는 1930년대 카우나스 곳곳의 건설현장, 산업현장, 생활상을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세계 경제공황을 비롯하여 위기가 지속된 시기였다. 독재체제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생 독립국을 지키려는 그들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나치가 득세하고 혁명 후 소련의 변화에 촉각을 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2차 대전 중에는 소련-나치-소련 순서로 점령당하고 1980년대 말까지 소련에 편입되었으니 이후 수십 년간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 짧았던 공화국 시기는 그저 좋은 '그때 그 시절'로 기억하게 되었다.

1930년대 카우나스 구시가지 모습

2층은 보수공사 중이었으나, 얼마 전에 연회장 복원이 끝났다며 직원 아주머니가 자랑스럽게 계단이며 거울, 의자, 카펫까지 짚어가며 보여 주었다. 소중했던 공화국 시기에 외국 사절들을 만나고 독립 리투아니아의 존재를 알리고자 노력했던 자리다. 연회장 옆에 집무실을 꾸몄는데, 책상과 전화기 등을 당시 느낌을 살려 전시해 놓았다.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면 공격적인 러시아어가 들린다. 1940년에 소련에서 리투아니아를 침공할 때, 바로 전날 전화로 막무가내 최후통첩을 날렸던 그 내용이라고 한다. 불과 며칠 후 소련에게 점령당했고, 스메토나 대통령은 독일로 피신해 나중에는 미국에 갔다고 한다. 그다음에 이 집무실을 차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후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역사적 정통성은 숲에서 반소련, 반외세 게릴라전을 시작한 빨치산 부대에게 있다. 

2016년 겨울 성탄 시즌 개막 행사에서 대통령궁의 연설과 시즌 선포(?) 순서

겨울마다 성탄절을 한 달 정도 앞둔 주말부터 공식적인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한다. 그때 이 궁 앞에서 개막 행사를 한 후 구시가 광장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점등 행사를 한다. 리투아니아 어로만 진행되기에 눈치껏 구경을 했는데, 옛 스타일 정장을 한 아저씨가 2층 발코니에서 그럴듯한 연설과 함께 성탄 시즌 시작을 선포하는 듯한 순서가 있었다. 어쩌면 당시 대통령이 그렇게 공화국의 크리스마스를 축하했을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때 대통령궁 정원 나무마다 눈이 아플 정도의 시퍼런 전구를 켠다. 평소 한적한 곳이 엄청나게 튀는 효과는 있다. 

짧았지만 독립국가로서 자존심과 희망이 있었고, 모든 것이 부족하고 미약해도 자유롭게 삶을 추구했던 그 20년간의 공화국 시기는 현대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구시청사나 카우나스 성채 같은 박물관은 중세의 유물 몇 가지와 그때의 용도, 복원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외관만 본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게 없을 정도로 중세의 기억은 공백이 많고 이야기가 빈약하다. 현대적인 민족국가의 존재 이유를 부여하는 이런 근현대 유산을 잘 살리는 게 훨씬 의미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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