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라이트

by 호운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공원 정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아저씨, 근데 오늘도 갈 곳 없지 않아요?"

"여기 정자에 있으면 됩니다, 작은 형님."

진국이 끼어들었다.

"그래, 우린 여기 있으면 되지 뭐."

"그러지 말고 집에 같이 가요."


집에 간다고?

이 시절 엄마 아빠를 다시 마주하는 것도

색다른 기분일 것 같았다.

"그래도 되나? 엄마 아빠가 눈치채지는 않겠지?"

"뭐요? 미래에서 온 거요?

제 생각엔 절대 모르실 것 같은데요?"

"그래, 그럼 가보자. 배도 엄청 고프다."

"밥도 주시는 건가요? 어서 가시죠, 형님들~"


익숙한 길을 지나 아파트로 들어갔다.

현관문 앞에 서자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도어록 내가 눌러봐도 돼?"

"눌러보세요~"

4-2-9-2

띠리릭-

문이 열렸다.

"엄마, 나 왔어!"

관희의 외침에

주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딜 갔다가 이제.... 어? 이분들은 누구시니?"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였다.


2026년 야위었던 모습은 간데없고,

누나라고 해도 될 정도의

어머니가 눈앞에 있었다.

나는 순간 온몸의 수분이

눈으로 집중됨을 느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관희랑 친한 형...

김미래라고 합니다."

"저는 그... 동생, 박진국입니다! 허허!"


어머니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편견 없는 분이셨다.

"오, 그래요. 어서들 와요~"

이후 관희의 터진 입술을 보더니

금세 비명을 질렀다.


"관희야! 얼굴이 왜 이래! 싸웠니?"

"맞았어요."

눈치 없는 진국이 끼어들었다.

"아냐, 엄마. 잠깐 일이 있었는데

분들이 도와줬어."

어머니는 연신 고맙다며

우리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거실 소파에는 머리숱이 울창한(?)

아버지가 신문을 보다

안경을 고쳐 쓰며 우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우리 관희가 신세를 졌나 보네요.

근데 그쪽은 저보다 형님 같으신데..."

"아, 저는 이 두 분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편히 하십시오."


그날 저녁, 그립던 밥상이 차려졌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와 노란 계란말이.

결혼하고는 자주 찾아가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과거에서 찾아올 줄이야..


진국이는 염치도 없이

밥을 두 공기째 비워내며 감탄했다.

"어머님, 이 멸치볶음은 국보급입니다!

2066년에는 멸치가 많이 줄어서

보기 힘든 맛이에요!

"진국 동생은 참 재밌는 분 같아요."

진국이의 엉뚱함 덕에

밥상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나는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자마자

목이 메었다.

20년 전 그 맛 그대로였다.

"미래 씨는 왜 밥을 안 드세요? 입에 안 맞아요?"

어머니의 걱정 어린 말투에

나는 겨우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뇨, 너무 맛있어서요..."

눈에 또 수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관희의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진국이는 배를 두드리며

벽에 기대어 졸고 있었고,

관희는 침대 끝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저씨, 아까 우리 아빠 머리숱 보면서

왜 그렇게 아련하게 웃었어요?"

"나중에 너도 알게 돼.

관리 잘하라고 전해드려라."

"근데 저도 관리 좀 해야겠어요."

"왜?"

"아저씨처럼 안 되려면...

아저씨가 저라면서요?"

이젠 제법 농담도 던지는 젊은 나 자신과

과거의 내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제법 나쁘지 않았다.


"아저씨."

"응?"

"근데 왜 하필 정자예요?"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 과거까지 왔으면 뭐 다른 것들도 많잖아요.

근데 뜬금없이 정자라니..."

"충격받지 말고 들어야 해."

"뭘요?"

"너 내 나이 되면 건강한 정자가 씨가 마른다...

그래서 난 아직 아이도 못 가졌어..."

"헐, 저 정력에 자신 있는데 무슨 소리예요?!"

"지금은 아마 건강할 거야.

그래서 내가 너의 건강한 그것을 가지고 가려고 온 거지."

"아..."


관희가 이제야

나의 상황을 조금 이해한 눈치였다.

그때였다.

책상 위에 놓인 관희의 애니콜 폴더폰이

'띠리링-' 소리를 내며 파란 불빛을 내뿜었다.

문자메시지가 온듯했다.

관희가 조심스럽게 폴더를 열었다.

옆에서 슬쩍 훔쳐보던 내 뒤로

어느새 진국이까지 다가와 문자를 보았다.


[발신: 이수현]

자? 내일 학교 끝나고 잠깐 볼 수 있어?

아, 그리고 준영 오빠가 막말한 거 그런 건 잊어.

참, 그 오빠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깡패 같더라.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관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헛웃음을 삼켰다.

"야, 김관희."

"네...?"

"너 약속 지켜라."

40년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이건 그린라이트였다.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