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관희. 그 카고 바지 당장 안 벗어?"
관희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바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래, 나도 저땐 저게 제일 멋있는 줄 알았지.'
"아저씨, 뭘 모르시네.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고
요새 잘 나가는 옷인데요?"
"내가 너라니까. 저거 입고 돌아다니다가
찐따 같다는 소리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당장 청바지로 갈아입어."
옆에서 지켜보던 진국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저는 작은 형님이 처음에 입은 게
더 멋있어 보입..."
"진국아. 너는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네, 형님. 입 닫겠습니다."
결국 흰 티에 청바지.
왁스로 앞머리만 살짝 세웠다.
거울 속에 선 20살의 나. 제법 근사했다.
40대의 묵직한 배와는 다른 날렵한 몸매.
'저 정도면 충분히 승산 있다.'
"근데 내가 너 나이 때는 여자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어버버 했는데 너도 그러지?"
"네... 어쩌죠? 벌써 심장 터질 것 같아요."
"그러게, 이걸 어쩐다..."
고민에 빠져 있는 무렵 진국이 주머니에서
사탕 같은 캡슐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보자 보자... 여기 있을 텐데..."
진국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더니
캡슐을 톡 깠다.
안에는 얇은 스티커 같은 게 들어있었다.
"형님, 이거 일회용 이어폰인데요..."
"야, 너 이런 거 있었으면서 왜 말 안 했어?"
"안 물어보셨잖아요."
"그건... 그렇지."
"이게 요원들이 쓰는 거라
마이크 기능도 있어서 멀리서도
선명하게 들리는 요물이죠."
"오, 이거 말고 신기한 거 또 있어?"
"많은데 저도 뭐가 있는지 잘 몰라요.
그냥 막 집어온 거라."
"좋았어~ 관희야, 이거 붙여봐. 아아, 들려?"
우리는 각자 흩어져 테스트를 해봤다.
"아아, 다들 들리는가?"
"우와, 엄청 잘 들려요!"
"관희, 이제 게임 끝이다.
40년의 내공을 보여주겠어. 시키는 대로만 해."
우리는 결전의 장소로 향했다.
작전명: 아바타
약속 시간 10분 전. 관희는 공원 벤치.
우리는 정자 쪽에서 관희를
멀찍이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진국이 테스트 겸 속삭였다.
"작은 형님, 자연스럽게 머리 쓸어 넘겨보세요."
관희가 움직였다.
"진국아, 이제 집중하자.
넌 가만있어. 이상한 소리 하면 죽는다."
"네, 형님. 전 팝콘 모드하겠습니다."
잠시 후, 저 멀리서 수현이가 걸어왔다.
햇살을 등지고 걸어오는 모습.
20년 전 기억보다 훨씬 눈부셨다.
"관희야, 긴장하지 마. 일단 웃어. 눈도 같이!"
수현이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관희야, 다친 곳은 좀 어때?"
"어? 아... 괜찮아. 별거 아니야."
녀석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수현이가 잠깐 관희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녀석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많이 아팠을 것 같은데."
"..."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야 이 새끼야, 말 좀 해!'
"야 이 새끼야, 말 좀 해!"
관희가 내 말을 따라 해 버렸다.
수현이 눈이 동그래졌다.
"... 응?"
긴급상황이었다.
저게 나라니 부끄러워할 시간이 없었다.
"관희야, 그냥 방금 한 말 노래처럼 흥얼거려.
작곡 중인 거라고 둘러대! 빨리!"
관희가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아, 요새 작곡에 관심 있어서
작업 중인 노래야. 들어볼래?"
수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곡? 오, 해봐!"
관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말 좀 해~♪
야 이 새끼야, 말 좀 해~♬"
어이가 없었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수현이가 피식 웃더니 같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야, 말 좀 해~♪"
둘은 깔깔거리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생각보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 풋풋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졌다.
"형님, 혹시 우세요?"
"안 울어 인마. 먼지가 들어간 거야."
그때였다.
낭만을 깨부수는 거친 오토바이 굉음.
준영이형이었다.
어제보다 패거리 둘을 더 데리고 나타났다.
무슨 추적기를 달아놨나.
어떻게 이렇게 우리가 있는 곳에
항상 나타나는 걸까.
"이 새끼들이 여기서 연애질이야?
김관희, 어제 운 좋았지? 아재랑 할배는 없네?"
준영이형이 다가와 수현이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오빠 그만해. 오빠 이런 양아치였어?"
지금의 관희는 도망치고 싶을 거다.
나도 저 나이 땐 쫄보였으니까.
나는 낮게 읊조렸다.
"관희야, 무섭지?
나랑 진국이 있으니까 쫄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진국이 주머니를 뒤지더니 캡슐 하나를 꺼냈다.
"형님, 재미난 거 하나 찾았습니다."
"뭔데?"
그때 관희가 준영이형 앞을 막아섰다.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눈빛은 그래도 살아있었다.
"형, 그만해요."
"뭐? 이 새끼가 진짜..."
준영이형이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관희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진국이 벌떡 일어나
관희 쪽으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작은 형님, 받으세요!"
진국이 캡슐을 관희에게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