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나비 효과의 연속
올해 초, 나는 연남동의 어느 카페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봤다면 일상적인 장면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무심코 지나가는 많은 순간들이 그렇듯, 그건 과거의 더 많은 사건들이 중첩되어 일상을 비틀어낸 순간이었다. 최소한 세 마리 나비가 맹렬히 날개짓하여 만든 바람이었고, 당시엔 몰랐지만 허리케인의 전조였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가를 설명하기 전에 그 나비들을 시간순으로 소개해보겠다.
1. 갑상선암 진단과 수술
2024년 4월은 내게 잔인한 달로 기억된다. 회사에서 의지했던 팀원들이 줄퇴사를 했고, 그들의 부재에 울적할 틈도 없이 프로젝트가 몰아닥쳤다. 저녁 9시에 퇴근하고도 자정 넘어서까지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는 나날이었다. 울고 싶어도 시간이 없었다. 한여름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껌 같은 상태로 허덕허덕 달리던 중, 나는 몸의 이상을 감지했다. 생전 처음 겪는 피로감이 엄습한 것이다. 이미 피곤한 상태였는데도 알아차릴 만큼 뭔가 달랐다. 영혼이 지구 내핵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불길했다. 안 그래도 2년 전부터 갑상선에 혹이 발견되어 추적 검사를 진행해오던 터였다. 피로감은 갑상선 호르몬 문제일 수 있다는데.....급하게 반차를 내고 조직 검사를 예약했다. 일이 워낙 몰아칠 때라 검사 당일 병원 대기실에 앉아 업무를 해야 했다.
슬픈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 일주일 뒤, 나는 전화를 통해 들려온 '유소견'이라는 단어에 황망해야 했다. 그 다음날 심각한 표정의 의사가 꺼낸 단어에는 더욱 황망했다. 암이요? 검사가 잘못 됐을 가능성은 없나요?
이번에도 울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하필 암은 기도와 식도와 후두신경이 교차하는 자리를 누르고 있었다. 수술을 지체하면 급속도로 전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갑상선 수술로 유명한 대학병원 몇 군데에 예약 문의를 돌렸다. 그러나 의료 대란 때문에 빨리 수술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결국 집 근처 병원에서 수술날짜를 잡았다. 그나마도 한 달 뒤에나 가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내가 얼마나 변수에 취약한지를 알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수술 전 한 달의 기다림을 통해, 나는 몸 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ct 촬영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암 판정을 받은 누가 평온할 수 있겠냐만, 정도가 너무 심했다. 적어도 나란 인간에게 갖고 있던 기대를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스스로를 성숙하고 대범한 사람으로 믿고 있던 나는 미친 소에 매달려 끌려다니는 투우사의 심정을 간접 체험해야 했다. 원망, 자책, 분노, 공포로 24시간 울부짖는 타인과 한 몸으로 묶인 것 같았다. 고문 같은 밤들이 뜬눈으로 흘러갔다.
다행히 전이는 없었고 암의 종류도 공격적이지 않아 수술은 반절제로 끝났다. 반 남은 갑상선이 고맙게도 열심히 일해줘서 호르몬제 없이 지내고 있다. 그러나 그때 겪은 극심한 동요는 마음 깊은 곳에 앙금을 남겼다.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실망감과 '내가 나를 불신하고 있다'는 자괴감이었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르는구나. 어렴풋이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이 느낌은 같은 해 10월에 날아온 두 번째 나비로 뚜렷해진다.
2. 할아버지의 사고와 요양
수술 후 휴직한 나는 엄마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틈틈이 부업도 하며 평온한 일상을 보내는 사이, 첫 번째 나비가 불러온 찻잔 속 폭풍은 잦아드는 듯싶었다. 하지만 평화는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깨졌다. 자전거로 논둑길을 달리던 할아버지가 넘어지셨는데 일어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병원에 간 할아버지는 인공 고관절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후로 맏딸인 엄마의 집에서 몸을 회복하셨다. 처음에는 함께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궂은 일은 대부분 엄마가 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갑상선 수술 직전에 그랬듯이 통제가 힘든 순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타나는 양상이 두 가지였다는 것이다.
어떨 때 나는 필요 이상으로 할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조금만 심기가 불편해보여도 안절부절 못했고, 아주 사소한 요구조차 거절하거나 타협하지 못했다. 호두과자가 먹고 싶다는 한 마디에 차를 끌고 나갈 정도였다.
처음엔 내가 할아버지와 친해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또 다른 양상이 설명되지 않았다. 어떨 때 나는 필요 이상으로 할아버지를 미워했다. 연세 많은 분이 서투르게 던진 농담에 혐오를 느꼈고, 식탁에서 얼굴을 보는 것조차 지긋지긋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면 후회가 밀려왔다. 그래서 더 잘해드리려 노력했지만 어째서인지 노력의 크기만큼 미움은 커졌다.
심리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읽었을 때 '반동형성'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식 수준에서 나를 표현할 네 글자는 '적반하장' 정도였다. 사실 이 문제에는 추가로 여러 과거사가 엮여 있지만 그건 이후에 쓸 글에서 풀어보겠다.
아무튼 내가 반동형성에 대해 알게 된 건 몇 달 뒤, 연남동 카페에 앉아 진행한 검사 덕분이었다.
3. 방어기제 유형 테스트
이 나비에는 앞장 서서 날았던 나비가 있다. a의 대학원 입학 준비다. a는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줄곧 심리상담 쪽으로의 커리어 전환을 꿈꿔왔다. 때문에 올해 대학원 합격을 목표로 심리학 공부를 하던 그가 어느 날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나: 이게 뭐야?
A: 이거 하면 방어기제 중에서 뭘 쓰는지 알 수 있대.
당시 내가 알던 방어기제란 '자아를 위협하는 것들을 처치해주는 무언가'였다. 방어기제에 유형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앞선 일들로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나는 바로 검사하고 결과를 보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A: 어떤 항목 찍은 거야? 결과가 왜 이래?
나: ? 뭐야 뭔데.
일단 '회피'가 너무 높았다. 검사 결과로 나올 수 있는 최고치였다. 쉴새없이 사람과 소통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스스로가 친구 사귀기를 꽤 좋아한다고 믿었던 나로서는 황당했다. 그 외에 '반동형성'을 비롯한 몇 개가 높았는데, 그 중 가장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바로 '신체화' 항목이었다.
신체화는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나 감정을 몸의 고통으로 전환해 표출하는 방어기제다. 물론 신체화도 적절히 쓰이면 도움이 된다. 문제는 이 역시 수치가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내 자아는 승화나 유머 같은 멋진 방패들을 엿바꿔먹고 '몸빵'으로 버텨왔던 것이다.
a의 설명을 듣자마자 수많은 부정맥과 두통의 나날이 뇌리를 스쳐갔다. 곧이어 자신의 무식함에 화가 치밀었다. 아니, 하고 많은 방법 중에 왜? 심지어 신체화로는 감정의 원인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그럼 고통이 심신 양면으로 두 배가 될 뿐이잖아!
그런데 a가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은 내 분노를 증발시켜 버렸다.
A: 꼭 그렇지는 않지만.....신체화가 높다는 건 어린 시절부터 스트레스가 많았을 가능성이 있대.
누구나 어린 아이일 때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도구를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달팽이처럼 움츠린 채 고통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순간이 많았던 사람은 어른이 되고도 습관에 기대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멍하니 과거를 되짚어봤지만 짐작 가는 일은 하나 뿐이었고, 그리 어린 시절도 아니었다. 앞서 서술한 첫 번째 자각과 두 번째 자각이 없었다면 난 그런 케이스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잊었을 것이다. 그 자체가 회피라는 걸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내가 들여다볼 수 없는 깊고 컴컴한 내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나는 그걸 부정하고 싶었다. 거길 기어다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전문가의 공인을 받고 싶었다.
그렇게 막연한 불안과 호승심에 휩싸인 나는 장기 상담을 신청하게 된다. 그리고 살면서 무심코 넘어가는 어떤 순간들이 그렇듯, 그 선택을 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