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입구 화단 옆에 대추가 한 알 떨어져 있다. 지나쳐가다가 되돌아와 줍는다. 연푸른 빛깔에 윤기가 나는 대추알이 굵기도 하거니와 싱싱하고 먹음직스럽다. 위를 올려다보니 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대추가 열렸다.
주워 든 대추를 옷에 쓱싹 닦아 손바닥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바라만 보아도 풋풋한 단맛이 입안에 감돈다. 장석주 시인의 언급처럼 대추 한 알이 여물어 내 손에 오기까지의 그 비바람과 햇볕과 구름이 흘러든다. 대추 한 알에 깃든 삶은 그 부피와 크기보다 훨씬 넓고 깊다.
땅에 떨어져 혼자 뒹군 대추는 지나가던 아이들이 나무에서 몇 개 따다가 흘린듯하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니 그냥 지나쳐 버렸다면 대추의 삶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다. 누구의 발길에 채일 수도 있겠고, 누구의 구둣발에 사정없이 짓이겨졌을 수도 있겠다. 떨어진 대추에서 나는 무언가 비밀스런 생의 한 단면을 본다. 그것이 무어라고 뚜렷하게 말할 수 없지만 대추에게도 대추의 삶이 있었다는 거다. 대추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고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기쁨에 겨운 한숨이라도 쉬지 않았을까. 떨어진 대추를 줍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섭리다. 엽기이고 반전이다.
지난여름 지인으로부터 설익은 포도송이 사진을 카톡으로 받은 적이 있다. 사진을 여는 순간 벅찬 그 무엇이 가슴을 휘저었다. 초록에서 보랏빛으로 넘어가는 그 어디쯤 섞인 포도송이는 단순한 포도가 아니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뭉클한 감정에 사진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철학이 있고 노래가 있었다. 예술이 있고 꿈이 있었다. 꿈을 꾸는 아이의 푸른 잎맥 같은 눈빛을 보는 것도 같았다. 설핏 푸르고 붉은 송이송이 포도송이가 치열한 인생 어디쯤 서성이고 있구나, 싶었다. 이렇게 익어가고 있었구나, 설익은 포도송이를 보는 그 며칠의 여름이 충만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학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여러 많은 작품이 나를 감동시켰지만 그중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나는 꼽는다. 서슬 퍼런 그의 문장에 압도당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을까. 소설뿐 아니라 그의 산문 ‘자전거 여행’도 마찬가지다. 그의 글을 읽고 내 마음의 울림이 얼마나 컸던지 그 후로 그 울림을 덮을만한 다른 작품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히 일곤 했지만 그의 글을 읽고 나서는 ‘나는 글을 쓸 재능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마음이 아프게 일어나서 좌절하곤 했다. 예리한 추리력과 집중적인 취재에 따른 거침없는 문장 그의 세밀한 감성과 문학적 상상, 거기에 맞는 기막힌 묘사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그는 있었다.
가끔 문학이란 무엇인가, 나를 향한 질문을 쏟아낸다. 뚜렷한 해답도 없는 안갯속 같은 그 무엇이 내 삶에 끼어들어와 방황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절망하게 했다. 내 안을 유영하는 감성적으로 예민한 더듬이 하나 때문에 내 삶은 꽃이 그늘인 순간이 많았다. 치열하게 쓰지 못한 스스로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나는 내가 너무 미운 적도 많았다. 딜레탕티즘에 빠진 나를 보는 건 더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아직도 나의 문학은 흐린 창가에 앉아 희뿌연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희미하다. 내가 걷는 세계는 답도 없는 무지한 거리를 헤매고 골목길을 누비고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는, 그러나 그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고 그 풍경 안에 내가 찾아가야 할 마땅한 목적지가 있음을 간절히 믿고 싶은 것이다. 설령 그곳을 찾을 수 없을지라도, 어딘가 거기 내가 찾는 그 무엇이 없어도 되고, 없어도 괜찮은 거라고, 그러나 그 미지의 풍경은 아름다워서 꿈꿀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나의 길을 간다. 그러다가 포도가 익어가듯 대추가 익어가듯 나의 글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익어 어느 날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눈물이 나도록 행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