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그랬던 것 같다. 어색하고 얄궂은 표정으로 겨우 꺼내 놓은 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저씨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아이고 한 말이라도 드리지요. 허허허… 그랬다.
쌀이 간당간당 바닥을 드러내도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불안하지 않다. 쌀이 떨어지고 돈이 떨어졌는데 웃을 수 있었다고 하면 믿을까. 배짱? 여유? 어찌 됐든 느긋했다. 나는 그때 그랬다.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부자로 살 거니까. 인생은 꿈꾸는 자의 것이니까. 내일은 희망제작소에 갈 수 있으니까. 푸른 광선은 언제나 내 쪽으로 비치고 있으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던 듯하다.
큰애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출산 후 일터로 돌아갔지만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계속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두어 달을 버텼지만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잘 먹어야 하는데 잘 먹지 못했고 밤낮이 바뀐 아기는 내 생체리듬에 맞춰주지 않았다. 낮에는 일터에서 밤에는 아이에게 혹사당하다 보니 오래된 감기는 폐렴까지 갔다. 입원을 했고 퇴원을 하는 과정에서 결국 사직서를 쓰고 말았다. 사직서는 반려됐다. 대신 무급휴가 6개월을 허락받았다.
한 사람 월급이 줄어드니 생활비는 빠듯했다. 늘 간당간당했다. 남편 월급을 타면 분유를 사고 쌀을 사고 한 달을 살 수 있는 기본 도구를 구비해두었어도 월급날 직전은 바닥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해 어느 날 급여일을 이틀 밤 앞두고 쌀이 떨어졌다. 돈도 떨어졌다. 라면을 먹자고 했다. 이틀인데 뭐. 그 정도쯤이야. 라면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런데 입이 짧은 나는 두 끼 라면 먹는 게 힘들었다. 잘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기를 업고 쌀집에 갔다. 큰 용기를 낸 거다. 아기 업은 어린 엄마는 쌀집 앞에 서서 계속 머뭇거렸다. 쌀집 아저씨는 눈짓으로 계속 말해보라 했지만 쭈뼛쭈뼛하다가 겨우 꺼낸 말은 쌀 한 되만 주시면 안 될까요,였다. 그날 아저씨는 쌀 한 말을 짊어지고 집까지 배달해줬다.
그게 이유였다. 외상으로 쌀 한 되가 아닌 한 말을 집으로 배달해 준 쌀집 아저씨 때문이었다. 고마워서, 세상에 이런 분이 계시다고 그 말을 아무 생각 없이 해버렸다. 그때 하필 전화를 건 조카에게 자랑삼아서 말이다. 퇴근한 남편에게도 쌀집 아저씨 이야길 꺼냈다. 우린 가난한 게 아니므로 진짜 돈이 없는 게 아니므로. 우린 그렇게 웃으며 저녁을 먹었고 감사했다.
뒷날, 아기를 업고 좁은 테라스에서 기저귀를 널고 있었다. 낯이 익은 중년 여자가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우리 집 쪽을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쯤으로 여기며 빨래 널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우리 집 계단을 널뛰듯 훅훅 올라서고 있다. 누구지? 궁금증에 바라보는데 세상에 큰언니다.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웬일이야 언니? 언니는 등에서 잠을 자는 아기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남은 빨래를 마저 널었다.
언니가 차려준 점심은 맛있었다. 고기를 굽고 나물을 무치고 집은 온기로 가득했다. 과일을 깎고 차를 마시는 시간이 따뜻했고 풍만했다. 그러는 중 잠자던 아기가 깨고,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언니는 또 청소기를 돌리고 구석구석 걸레질을 했다. 왜 갑자기 연락도 없이 왔느냐고 나는 아기를 안고 분유를 먹이다가 무심결에 물었다. 언니는 걸레질을 하다 말고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 맙소사! 어제 조카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외상으로 받은 쌀 한 말 이야기. 쑥스럽고 부끄러워 몇 번을 망설이고 망설이다 겨우 터진 그 말.
멋쩍게 웃었다. 언니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고 어색하게 침묵만 흘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무언의 행간을 견디기 어려워 말을 꺼냈다. 언니 그게 아니고, 우리가 저축을 많이 하다 보니 그런 것이지 진짜 돈이 없는 건 아니야. 내가 잠깐 쉬어서 그렇고 곧 일터로 나갈 거야. 김 서방은 요즘 주말에 과외도 해. 이래 봬도 김 서방 대기업에 다녀. 걱정 마 언니….
결사적으로 결혼을 반대한 사람 1호가 큰언니였다. 사랑은 유효기간 3개월이라고 말했던 사람도 큰언니였다. 사람을 어떻게 돈으로 평가해? 언니 그런 사람이었어? 사람을 먼저 봐야 하는 거 아냐? 나 반드시 잘 살 거야. 제발 날 좀 믿어줘. 그렇게 언니에게 대들며 하소연했던 것 같다.
오후 2시쯤 언니는 집을 나섰다. 나는 포대기 끈으로 어깨를 둘러 칭칭 감아 아이를 업었다. 신월사거리 버스정류장까지 나가려면 신월3동 골목시장을 지나 꽤 긴 거리를 걸어야 했고 그 거리 중간쯤 대형 마트가 있었다. 마트에서 언니는 분유 1박스를 주문했다. 쌀 과일 과자 등등 쇼핑카를 가득 채웠다. 어리둥절했다. 나는 한 번도 이러한 쇼핑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배달을 신청하고 마트 앞 길거리에서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비행기의 굉음이 언니의 목소리를 잡아먹은 그때 콧속을 찌르는 매운 그 무엇. 가난하다 불행하다 어렵다 힘들다, 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었던 것뿐인데, 서러운 눈물이 터져버렸다. 꺽꺽 울었다. 눈물이 멈추어지지 않았다. 나도 울고 언니도 울었다.
사람도 자연도 흔들리며 산다. 수만의 길, 수만 가지의 마음 그 입구에서 나는 흔들렸고, 서성였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았다. 미련따위는 버렸고 집중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길’을 떠올렸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을 통해 길은 단절되어 있음을 아쉬워했지만 프루스트는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위로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화자인 ‘나’가 사랑하는 질베르트를 통하여 두 길이 하나임을 깨닫게 되었듯이, 나도 그렇다고. 현재의 순간순간을 모두 사랑하며 살았다고.
젊음이란 스스로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믿었고, 결국 내가 지켜야 할 것은 흔들리지 않는 내 영혼이었다. 삼라만상의 변화와 순환을 믿었으므로. 중요한 건 사랑이었으므로.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2015년 2월 네팔 룸비니 아침 거리.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 같은 음습한 그 거리 햇살 한줄기는 순식간에 안개를 삼켜버렸다. 빛의 속도,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