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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Apr 03. 2021

꽃 피듯 꽃 지듯

부모 된 마음

  “척”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빛의 속도로 폰을 주워 든 아이는 먼저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망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 표정만 살필 뿐이었다. 폰은 다행히 이상이 없었고, 아이는 이내 정문으로 향하는 빽빽한 사람들 틈으로 순식간에 흡수돼 들어갔다.

 왈칵 눈물이 났다. 몇 번의 고배를 마시고 응시한 시험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마음에 정문을 벗어나 한쪽에 차를 세웠다. 하필 시험 보는 날 아침 수험장 앞에서 핸드폰을 떨어뜨렸고, 아이의 불안한 눈빛을 보고 말았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속상했다.


  

  오늘 아침, 입사 5년 차인 아이는 응시생이 아닌 시험 감독관으로 신입사원 공채 수험장에 갔다. 아침을 차려주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가진 자의 여유를 누리겠거니, 아니 그러기를 바라며 한 질문이었다. 밥 한 숟갈을 입에 넣고 한참을 오물거리던 아이는 곰곰한 표정으로 그날 핸드폰 떨어뜨린 이야기를 했다.  

  “아, 또 떨어지겠구나! 했지 뭐. 그런데 엄마가 괜찮아 그냥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뿐이야. 그러더라고.”

  “엥? 내가 그렇게 말했어?”

  “아니, 그렇게 들렸다는 거지. 기도하는 엄마를 아니까….”

  순간 바짝 긴장이 됐다. 그때 미안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기도하는 엄마를 아니까? 엄마가 기도하고 있으니까, 가 아니라 기도하는 엄마를 ‘아니까’에 방점을 찍었다. 안다는 건 뭔가. 내가 네 마음을 알고 믿는다는 것. 관계에서 오는 무한 신뢰와 마음의 깊이를 안다는 것.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무엇. 그런 의미?

     

  엄마가 되고부터 우선순위는 아이였다. 내 신상의 그 어떤 기쁜 일도 아이 일보다 앞서지 못했다. 첫아이라 더 그랬다. 내 삶은 오로지 아이를 위해 생겨난 것만 같았다.

  생후 2개월이 지나 남의 손에 맡겨졌다. 돌이 지나면서부터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했다. 매일 아침 전쟁 같은 실랑이를 했다. 아침마다 어린이집 입구에서 안간힘을 쓰는 아이를 두고 나는 독하게 일터로 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시력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이는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안과를 들락거렸다. 나는 기다림에 서툴렀고 칭찬보다 질책이 앞섰다. 첫 아이로 와서 서툰 엄마의 모험 속에서 자랐다. 지나치게 이타적이고 자기표현이 서툴렀다. 그게 다 엄마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쓰라렸다. 또 아이의 실패는 나의 실패 같았다. 대입에 좌절했고 취업시험엔 수없는 고배를 마셨다. 그때마다 엄마인 내가 더 못 견뎌했다. 불합격 통보를 받은 아이는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차라리 큰소리로 울기라도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핸드폰이 떨어지는 순간 느낀 당혹감을 나도 기억한다. 불안했다. 그런데 내색할 수 없었고 위로의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이 아이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말하지 못했고 엄마가 당황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의식 중에 있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못했고, 아이는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 나는 정문을 비켜선 도로에 차를 정차하고 한참을 핸들에 고개를 묻었다. 그런데 엄마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엄마답지 못한 행동에 미안스러워 시험이 끝나는 시간까지 말을 아꼈었는데. 입을 벌리기라도 하면 말이 아니라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묵묵히 시간을 견디었는데…. 고마웠다.


  혼돈의 기억도 꽃그늘 아래처럼 환할 수 있다는 걸 망각했다. 꽃이 필 때가 있고 꽃이 질 때가 있듯, 부끄러웠던 것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고, 부끄럽지 않았던 것도 부끄러워질 수 있으니. 그저 성실하고 정직하게 현재를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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