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여뀌 사진을 올렸다. 아차, 하고 작년 이맘때 사진을 찾아보았다. 여뀌 사진을 찍었던 그때보다 한 주가 훌쩍 지났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카메라를 챙겨 들고 여뀌 군락으로 달려갔다. 여뀌는 가을이면 더 붉어지는, 그래서 초가을 삽상함을 가장 먼저 느끼게 한 풀꽃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뀌 군락에 달려갔는데 여뀌는 사라지고 없었다. 몇 군데를 더 둘러봐도 여뀌는 흔적도 없었다.
“여뀌야, 나도 보지 않고 어디로 가 버렸니?”
나도 모르게 독백처럼 한마디 덧붙이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왔다. 내가 왜 이러나, 풀꽃 하나 가지고 왜 이렇게 감정이 앞서는 건가. 여뀌가 라벤더나 핑크뮬리였다면 제초작업을 해버리지 않았을 건데. 여뀌도 꽃인데 말끔하게 제거해버리다니! 원망이 눈물로 번진 거였다. 그저 혼자 나서 자라는 풀꽃, 아무도 눈여겨봐주지 않는 풀꽃인 거였구나 너는. 내게 땅이 있다면 널 심어 라벤더 군락보다 더 아름다운 밭을 만들어 줄 텐데 꼭 그렇게 해 줄게. 여뀌 군락 밑동까지 확실하게 제거해버린 뿌리를 어루만지며 다짐을 했다. 혼자 나서 피고 지는 무명한 풀꽃인 여뀌에게 미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를 여뀌에게 이입했던 걸까.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아무도 눈여겨봐주지 않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땅을 일구고 자식에게 온몸을 내주었던 풀꽃 같은 사람,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 매를 맞은 적이 있다. 무슨 일이었는지 정확한 건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집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면서도 아버지가 내게 호통을 쳤다는 그 자체가 서운했다. 아버지가 내게 왜 이러지? 이 정돈 봐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서운한 감정이 앞섰다. 잘못을 뉘우치기보다 아버지가 내게 매를 들다니! 매를 든 아버지가 야속해서 더 서러웠던 기억이다. 그날 아버지는 나를 오래도록 업어줬다. 그 넓은 등의 따스함과 조곤조곤 아버지의 목소리에 매를 맞은 상처가 씻어졌다.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아버지를 바라보았고, 원망하는 눈빛의 나의 눈과 아버지의 눈이 딱 마주쳤을 때 흔들리는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다. 매를 들어놓고 다시 나를 업었다는 것. 나를 업고 골목길을 걸었다는 것. 왜 그랬느냐며 아빠의 마음을 드러냈던 일.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한 두런두런한 그 목소리가 아직 내 귀엔 쟁쟁하다. 아버지는 구겨진 나의 자존심을 완벽하게 회복시켜주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매 맞은 기억은 사라지고 업힌 기억만 선명해진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훈김이 올라온다.
나는 힘들고 마음이 어려워질 때면 아버지의 목소리를 기억해낸다. 그러면 목각 같은 크고 거친 아버지의 손이 나의 등을 쓰다듬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은 늦둥이의 특권이었다. 그 사랑의 특권을 충분히 누렸으면 좋았으련만 늙은 아버지 늙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더 많았다. 왜 나의 부모는 늙은 건가. 왜 나는 젊은 부모를 가질 수 없는 건가. 젊은 부모를 가질 수 없음이 억울했다. 그 시절 가장 깊은 콤플렉스는 늙은 부모였다. 친구들의 젊은 부모를 바라보면 부러웠다. 늙은 부모가 부끄러웠다. 학교에 못 오게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 부끄러워서. 6학년 초등학교 마지막 가을운동회 날에는 애원하다시피 오지 말라고 했다. 진짜 오지 않았다. 가장 맛있는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갔지만 가장 맛없는 밥을 먹었다. 부모를 두고도 고아처럼 눈물 밥을 먹었다.
가을 햇살이 유난히 뜨겁던 그날, 혼자 터덜터덜 신작로를 걸어 집으로 가는 길 역광에 눈부신 여뀌를 만났다. 나는 그날 여뀌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여뀌에게 털어놓았던 걸까. 냇가 무성한 풀무더기 속에서 유난히 붉게 피어있던 애꿎은 여뀌만 한아름 따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여뀌는 여기저기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골목길에도 풀밭에도 논가에도 밭 언덕에도 그들만의 자리를 차지하며 살고 있었다. 여뀌를 보면 대책 없이 센티해진다. 애잔하다 쓸쓸하다 그립다 보고 싶다 이런 단어 속에 여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