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gang Jan 08. 2019

풍로초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한창 꽃대를 올리는 풍로초 줄기를 잘랐다. 자른 줄기를 모아 작은 화분에 꺾꽂이를 해 두었는데 시름시름 앓는다. 아무리 봐도 살아서 제구실을 못할 것만 같은데 이겨내고 견뎌낸다. 며칠 지나 보니 이파리가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겉으로도 앓고 속으로도 앓고, 그러면서 그들은 내면으로 온 힘을 다 쏟은 모양이다. 고개를 떠들고 일어나기에 흙을 슬며시 파보니 그새 생선살 같은 실뿌리를 내려 땅속에 스미고 있다. 뿌리를 내리고서야 겨우 고개를 치켜들 수 있었던 것이다. 꽃도 적당한 긴장과 시련이 필요한 것일까. 주기적으로 줄기를 꺾어주었더니 어미 분도 새끼 분도 더 건강한 꽃을 피우고 있다. 놀랍다. 사는 방법은 저들도 다를 바가 없구나 싶다. 


 그와 내가 살던 집은 신월3동 상업은행 뒷골목에 있었다. 집집이 까만 대문을 반쯤 열어놓고 살았다. 반지하 두 가구와 1층 두 가구를 합해 네 가구는 세를 주고 2층 독채는 주인이 사는, 그런 유형의 집들이 즐비한 동네. 90년대 초 서민이 사는 마을 주택 특징이 대부분 그랬다. 우리가 살던 집은 지은 지 가장 오래된 양옥집이었다. 세를 놓기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주인집 할머니가 쓰던 방을 뒤란 쪽으로 벽을 뚫어 문을 내고 베니어합판으로 얼기설기 엮어 임시 부엌을 만들어 놓은, 주인집 거실로 드나드는 문은 억지로 못을 친 그런 집이었다. 신혼부부가 살만한, 방 두 칸에 입식 부엌이 있는 꿈같은 집이 골목 가득 즐비했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집은 없었다. 베니어합판으로 얼기설기 엮은 집이라도 거기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를 위해 마련된 가장 좋은 집이라 생각했다. 대출을 낀 9백만 원의 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때에 맞춰 마련된 것은 기적이라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때 주인 아들이 입대했고, 하필이면 그때 주인집의 가세가 기울었고, 하필이면 그때 가난한 우리가 그 집을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둘이 함께하니 위안이 되는구나, 가난이란 아프기도 불편하기도 한 것이구나, 적당한 시련은 활력이 되는구나, 결혼이란 부모를 떠나는 것이고 책임감이 따르는 것이구나… 이러한 생각들로 보내던 나날이었다. ‘재들이 얼마나 더 버틸까…’ 불안한 시선을 무시한 채 우린 서로 신뢰를 쌓아가던 시간이었다. 큐티(Q.T)와 새벽기도가 가장 큰 힘이었고 더 단단하게 다져가는 중이었다. 외적인 조건보다 앞선, 기도하는 삶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뿌리를 내리는 시기였다.      

 

신입사원인 그는 상업은행 건너편에서 광화문행 61번 좌석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나는 상업은행 건너편에서 3분 거리에 있는 S 병원에 출근했다. 일찍 퇴근하여 저녁을 준비해놓고 그를 기다렸다. 그가 버스에서 내릴 시간에 맞춰 더러 버스정류장에서 61번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다. 말끔한 정장차림의 신입사원인 그와 빨간 꽃무늬원피스를 입은 초보아내는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 고강동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말없이 걷기도 했다. ‘사랑은 가진 것 없고 기댈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전경린 ‘물의 정거장’)이었다. 가진 것이 없었지만 부유했고, 기댈 것이 없었지만 의지할 수 있었고, 단칸방에 몸을 뉘였지만 비좁지 않았던, 가난했던 날들이 더 풍요했던….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반전도 있다는 걸 그때 우린 체험했다.      

 

 사람의 겉과 속은 보는 이의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과도 같다. 그게 사랑이고 믿음이다. 우리 결혼은 그 안에 있었다. 보이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마음과 마음사이에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달려왔던 결혼이라는 선택에는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더 큰 마음이 흐르고 있었다. 가난했지만 가난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망연히 바라보는 베란다에 햇살이 내려와 놀고 있다.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풍로초 분홍 꽃잎 위에 내려앉은 햇살이 참 고마운 오후이다. 일상이라는 것이 저기 저 꽃잎 위에 내려앉은 햇볕만큼이나 따스하고 평화로운 날만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그건 욕심일 것이고 어쩜 삶을 비의욕적으로 살도록 내버려둘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란 때때로 흐린 날도 바람 부는 날도 있어야 저기 저 꽃잎 위에 내려앉은 햇살이 고마운 것이고 따스한 것이고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리라.


 한창 젊음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와 내가 결혼이라는 허울 아래 좌절했던, 그 한순간이 키운 내면은 깊을 대로 깊어졌다. 사랑이라는 괴물은 가난도 모욕도 뛰어넘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가치라면 누군가 비웃을까. 꺾꽂이한 풍로초가 더 튼실하고 건강한 꽃을 피운다는 것도 좌절의 한순간을 잘 이겨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필이면 : 되어 가는 일이나 결정된 일이 못마땅하여 돌이켜 묻거나 꼭 그래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캐물을 때 쓰는 부사이지만, 여기에 사용한 이유는 역설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전 16화 닮아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