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노래
80년 대 초반 가난한 20대였던 나는 늘 독서에 목이 말라있었다. 읽고 싶은 책을 사서 마음대로 읽을 형편이 되지 않았던 시절, 근처에 대형서점이 있다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고 그곳은 지적 허영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그때 문학과의 감성코드를 제대로 덧입혀준 책이 있었는데, 최인호 작가의 ‘겨울 나그네’였다. 신문에 인기 연재되었던 작품이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그날을 기억한다. 퇴근 후 서점 귀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야금야금 읽어 나갔던 소설은 뒷날 퇴근 시간을 기다리게 했고, 마지막 페이지가 다가올수록 아껴 읽었던 것을 기억하면 나도 모르게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나곤 한다. 랭보를 알게 된 것은 그때였다. 책 속에 인용된 ‘소요’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여름날 푸른 석양 보리 향기에 취해
풀잎새 함부로 밟고 조롱길을 걸어가면
마음은 꿈을 꾸고 발걸음은 가벼워
들 바람에 맨머리 시원스러이 불리운다
아무 말도, 생각도, 하지 않건만
가슴속에 용솟음치는
아-. 끝없는 사랑
나는 걸어가리라.
멀리 멀리
잠자리 없는 나그네처럼 자연 속을 걸어가리라
애인과 같이 가던 마음 즐거이!
랭보 <소요>
더러 ‘감각’으로 번역되었지만 여기서는 ‘소요’로 번역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와 맞물려 공감 100퍼센트를 유도하던 시 ‘소요’는 랭보를 향한 호기심을 발동케 했다. 이 시가 내게 준 감성은 생각보다 커서 목덜미에 땀이 송송 맺히는 계절이 오면 무의식 중에 ‘여름날 푸른 석양 보리향기에 취해....’를 읊조리며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마치 랭보가 된 것처럼 그의 암울한 우울 속에 갇혀 들길을 산길을 방랑하게 될 때가 있다. 20대 나의 방랑은 사회 통념에 대한 거센 반발과 함께 많이 외롭고 지쳐 위험수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를 지켜준 것은 책이었고 신앙이었다.
소설 ‘겨울 나그네’는 90년 대 TV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물론 영화로도 제작됐다. 그만큼 시대적 배경과 그 시절 젊은 청춘들의 감성을 잘 표현했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와 최인호의 <겨울 나그네> 그리고 랭보의 <소요>와 박목월의 <4월의 노래> 그들 4인방은 나의 삶에 끼어들어 어설픈 문학에의 갈증으로 허덕이던 날들이 많았다.
쟝 니꼴라 아르뛰르 랭보(1854-1891)를 이야기하기 위한 서문이 너무 길어졌다. 랭보를 알게 된 계기를 말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랭보에 대해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저는 일광욕, 끝없는 산책, 모험, 방랑생활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신문과 책을 읽고 싶지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지적 욕구와 탐구심이 남달랐던 열다섯 살 어린 랭보가 수사학 교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 한마디의 행간에는 랭보를 수식하는 여러 정황이 드러난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가 보낸 방랑의 시간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를 수식하는 천재 시인은 왜 붙어 따라다녔는지를. 천재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걸 랭보를 통해 짐작하고 생각한다. 그는 어린 나이에 수사학 라틴어 작문, 프랑스어 작문, 라틴어 시, 라틴어 번역, 그리스어 번역, 암송 등 모든 과목에서 상을 휩쓰는 최우수 학생이었다. 닥치는 대로 읽었고, 읽을거리가 없을 때의 권태를 못 견뎌했다.
랭보는 1854년 10월 20일, 프랑스 북동쪽 벨기에 국경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사를빌에서 태어났다. 습해서 안개가 잦고 단조롭고 음울한 곳이었다. 군인인 아버지는 늘 부재였다. 아들의 출생 순간에도 없었던 아버지는 어쩌다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는데 1860년 봄에 며칠을 가족과 보낸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재와 엄격한 어머니 그리고 신앙에의 갈등... 내면에서 들끓는 지적 허영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 환경과 여건이 그를 무한한 방랑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들은 저마다 자신의 말로 랭보를 규정한다. 폴 베를렌은 ‘바람구두를 신은 사내’라고. 앙드레 브르통은 ‘젊은이의 신’이라고. 알베르 카뮈는 ‘가장 위대한 반항 시인’이라 말했다. 앙토냉 아르토는 랭보가 ‘시의 비밀스러운 삶을 발견해 냈’다고 말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그가 ‘시를 혁신’했다고 단언했다. 자크리 비에르는 ‘랭보가 이 땅에 다녀간 건 인류가 겪은 놀라운 모험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많은 사람들이 랭보에게 매료되는 건 꼭 그의 시 때문만은 아닌듯하다. 일찍 천재성을 드러내고 열아홉 살까지 불을 토하듯 도발적인 시를 쏟아낸 뒤 스무 살에 절필했다. 그 이후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고 아프리카를 떠돌다가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삶 자체가 신화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870년 5월 24일 랭보는 첫 번째 가출을 한다. 석 달 뒤인 8월 31일 그를 찾아 집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샤를빌 콜라주의 교사 조르주 이장바르다. 랭보는 집에 온 지 열흘 뒤인 10월 7일 2차 가출을 감행한다. 이번에는 걸어서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두에까지 간다. 그 길에서 랭보는 시작(詩作)을 한다. ‘간교한 여자’ ‘나의 방랑생활’ 등이 그것이다.
소년 랭보의 허름한 행색은 길에서 검문하던 헌병의 눈에 띄었고 헌병의 연락을 받은 어머니가 달려갔다. ‘모범생’ 랭보는 왜 이렇게 변한 걸까. 평론가들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의 차가운 성격과 기독교적 엄격함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부모의 이혼 보불전쟁 발발, 모범생이었던 랭보는 불량소년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랭보에게 시 쓰기란 남의 고통에 함께 괴로워하고 현실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행위였으니, 그에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민족주의, 기독교 등은 당연히 조소의 대상으로 보였다. 그런 그는 ‘나는 행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았다’고 외친다.
그에게 신앙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도덕적 잣대를 긋는 신앙의 규범 아래 있었으면 그는 정도의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저주받은 연인으로 떠들썩했던 베를렌과도 문학이라는 토대 위에 서로에게 깊은 영향력을 남겼을 것이고 그의 천재성을 더 오래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3년 가까이 두 사람은 가족을 멀리하고 영국과 벨기에를 함께 여행하며 서로에게 밀접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지만 결국엔 동성애와 불명예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고 헤어지고 만다.
그의 방랑 생활을 단적으로 드러낸 시 한 편 붙인다.
나는 떠났지. 다 헤진 양복을 걸치고
그 찢어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시의 신이여! 나는 하늘 아래에 사는
당신의 충성스러운 신하.
오, 랄랄라. 내 얼마나 멋진 사랑을 꿈꾸었으리.
단벌바지엔 구멍이 났지
꼬마몽상가라 길에서 운율을
훑었지. 내 주막은 대웅좌 운율에 있었어
하늘에선 내 별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길가에 앉아 나는 들었지
아름다운 9월의 멋진 저녁소리를
이마엔
이슬방울 떨어졌어 힘나는 술같이.
환상적인 그림자 속에서 운을 맞추며
가슴 가까이 발을 대고 나도 리라타듯
내 터진 구두의 구두끈을 잡아 다녔지!
랭보 <나의 방랑생활>
참고서적:
그 누가 커다란 사랑에 관해서 말하리 (김학준 옮김)
랭보의 마지막 날 (백선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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