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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Aug 30. 2020

지금 행복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한창훈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읽고


 섬에 갇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아무 대책도 없이 그저 고립되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사람 사이에서 오는 어떤 갈등 또는 다름의 가치를 왜곡하는 그들에 대한 회의감에서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건 욕심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 그 대상에서 나는 제외된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한창훈의 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읽으며 다소 억지스러운 우화풍의 소설에 쏙쏙 빠져들었던 이유가, 그런 나의 심경 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니! 사람과 사람 사이 그 미묘한 갈등을 그들은 그렇게 해결한다. 단 한 줄의 짧은 법 조항, 잔잔하거나 높게 치솟거나 언제나 똑같이, 라는 파도처럼 모두 같은 높이에 동일하게 대우받는다는 단 한 줄의 정의, 그 한 문장의 말. 그들은 만나면 서로 손을 뻗어 어깨에 대는 것으로 인사를 한다. ‘저는 당신보다 높지 않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그 법으로 살았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낮지 않았다. 그들은 그 법이 마음에 들었다 (21쪽)


 이 소설은 남대서양 바다 한가운데 트리스탄 다쿠냐, 라는 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섬은 너무나 거친 자연환경 탓에 수만 년 동안 무인도로 버려져있었다. 국토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가 잠시 들어와 있었지만 군인들조차 가히 살인적인 혹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던 곳이다. 그곳에 단 한 사람, 군대와 함께 들어왔던 ‘측량사’만 남았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며 한 때 자신이 꿈꾸었던 천체 물리학자를 떠올리며 섬에 적응해간다. 가히 살인적인 외로움에 치를 떨 때 그는 꽃이 피는 분지와 늪지대와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며 섬사람으로 변해간다. 그 후 표류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갔고 그들과 함께 낚시하는 법을 배우며 섬에 남아 마을을 꾸렸다. 거칠고 혹독한 환경을 견디고 일구며 그 작은 공동체는 성장하였고, 측량사가 섬에 남은 지 10년째가 되자 섬주민은 여든 명으로 불어났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의견도 달랐다. 그때 그들에게 법이 필요했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 는 것은 그들의 법이었다.


 배가 고파 찾아오면 나누어 먹고, 남의 집 개가 정원을 망쳐놓으면 개를 야단친 다음 쓰다듬어 주고 다툼이 일어나면 흥분이 가라앉길 기다린다. 단 한 줄의 법은 그렇게 그들과 함께 행복을 누렸다. 섬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을 기억하지 않았다. 행복은 불행을 겪는 와중에 생기는 것이었을까. 행복해, 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행복했다. 아니 행복이라는 말이 없어도 그들의 일상은 충분히 행복했다.


 “발전된 고국의 모습을 보시는 게 기쁘지 않나요?”

 “커다란 공장과 아무 말 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어떻게 기쁠 수가 있죠?”

 “기계가 기계 만드는 것을 왜 부러워하는 거죠?”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발전된 고국을 보는 일도 아니고 자식이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옷을 입고 뽐내는 것도 아닌 단 한 줄의 법조문만 있는 나라에서 배가 고파 찾아오면 나누어 먹고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이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다. 어딘가로 여행을 가고, 어딘가에 가서 목적을 이루는 일을 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닌, 매일을 무언가 준비하는 일에 시달리고 몰두해야만 하는 그런 나라가 아닌, 경쟁이 없는 원시의 풍광에서 자연과 사람과 하나 되어 만끽하고 즐길 수 있는 그런 날을 꿈 꾸고 있다는 것.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고 필요한 만큼 일하고 나누어 가지는 그런 삶. 그저 바람소리를 듣고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꽃이 피는 것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사는 나라, 다툼이 없고 분쟁이 없는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이 그들의 삶인 것이다


 ‘저는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행복해요’ 말하는 아이에게 교사는 끊임없이 체벌을 하고 체벌이 끝나면 지난주에 했던 훈계를 다시 한다. 피아노만 열심히 친다고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는 없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원하는 상급학교에 갈 수 있고 상급학교에서도 열심히 해야 유학을 갈 수 있다, 그래야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 있고 원하는 직장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행복해진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라…….


 예민하고 타고난 음감을 가진 아이, 피아노를 치면 행복하다는 아이,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섬으로 돌아가지 않은 아이, 모든 소리가 몸을 타고 흐르는 아이, 그 소리와 음계를 자유롭게 가지고 노는 아이에게 선생은 악보대로 연습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연주자가 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는 대답한다.  


 “지금 행복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그렇다. 지금 행복하게 해 주면 안 될까. 준비하고 기다리고 견뎌서 나중에 행복해지는 삶이 아닌, 실체가 없는 행복을 좇느라 계속 불행하게 사는 삶이 아닌, 현재 행복하기 위한 바른 선택은 무엇인지 현재가 행복하고 미래도 행복해질 수 있는, 피아노를 치면 행복한 아이, 온몸으로 음이 흐르는 아이에게 지금 행복하게 해 주면 안 될까? 스펙을 쌓아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즐겁고 기쁜 일을 하므로 저절로 스펙이 되는 그런 꿈은 무의미한 건가.

 작가는 20대 후반에 우연히 칼럼 한 토막을 읽게 된다. ‘단 한 줄의 법조문만 있는 나라’ 남대서양 화산섬인 트리스탄 다쿠냐 섬 이야기였다. 그 섬에 잠시 주둔했던 영국군이 거친 환경 탓에 철수를 했는데 한 하사관 가족이 남아 공동체를 꾸렸다는 것. 그곳의 법은 단 한 줄.  “누구도 특권을 누려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간주된다.” 는 모두가 특권 없이 공평하게 사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소설을 쓰게 되었단다.

 빈부귀천이 없어서 그곳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조차 모른다. 순리대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간다. 작가는 다섯 편의 연작소설을 통해 ‘물질과 소유 중심주의’ ‘소통과 공감의 부재’ ‘성공지상주의’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주의’ ‘독재의 폐해에 시달리는 사회’를 풍자한다. ‘쿠니의 이야기 들어주는 집’을 통해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짚고 ‘그 아이’를 통해 성공과 일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그곳으로’를 통해 지도자의 독선적인 판단이 모두를 얼마나 큰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지도 보여준다. 그리고 ‘준비를 해야 행복해진다고’ 믿는 우리에게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은 곳에서 행복하기 위해 세워 둔 기준들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그  틀에 맞추어 통과해가며 사는 삶이 아닌 지금 현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섬은 없는 걸까. 현실도피가 아닌, 원시의 자연스러움에 스며드는 그런 시간 속을 살 수는 없는 걸까.


* 1년 전에 써 놓았던 글을 옮겨 놓는다. 코로나 블루를 겪으며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떠올렸다. 

   어느 누구도 누구보다 높지 않은 그런 나라가 우리에게도 해당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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