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나’는 어학원에서 몇 달째 수업을 같이 듣고 있었다. 열다섯 명의 외국인 틈에서 우리 둘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서로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언니가 '나'에게 말을 건 날에는 비가 흩뿌렸다. 어둑어둑해진 강의실에서 <비 오는 날> 샹송을 들었고 배경음악처럼 깔리던 빗소리 때문이었는지,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나에게 언니는 “한국인이죠? 바쁘지 않으면 술이라도 한잔할래요?”라고 물었다.
두 시간 동안 포도주를 마시며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은 단지 언니가 직장인이고 ‘나’ 역시도 프랑스에 오기 전까지는 직장인이었다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은 에리크 로메르의 <녹색 광선>과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좋아하고, 비슷한 정치 성향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사람 모두 삼십 대 초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삶을 꿈꾸며 프랑스에 건너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가로막고 있던 벽을 허물었다.
그날 언니와 나눈 대화는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니까, 어떤 이와 주고받는 말들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대화를 나누는 존재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술집의 이름도, 풍경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곳에서 언니가 ‘나’에게 "프랑스에 와 지낸 지 2년이 되었지만 이렇게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것은 정말 처음이야"라고 말했을 때의 표정과 말투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언니는 싱글인 여성 주재원으로 사는 일의 고충에 대해서 많은 말을 했다. 주재원들끼리 모임도 있고 회식도 있지만, 대부분 남자이다 보니 언니는 어울리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것도 불편할 때가 많다거나, 그런 모임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주재원의 아내들과 주로 말을 섞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아니, 나는 주재원의 아내가 아니라 주재원인데, 왜 매번 그런 식이 되어버리느냐고.”
언니가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언니의 말을 듣는 동안만큼은 답답한 마음이 ‘나’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나’는 언니를 따라 속상해하거나 같이 분개했다.
그런 언니와 ‘나’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내가 프랑스인 브리스와 결혼을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언니와 ‘나’의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자각하게 될 때 언니는 프랑스에 한시적으로 머물다 돌아갈 사람이고 ‘나’는 여기에 남을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놓은 듯했다. 언니는 여행에 대해 자주 말했고 어떻게 하면 얼마 남지 않은 프랑스 체류기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고 내게는 이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들이 필요했다. 내가 프랑스에 사는 한인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 강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들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한국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엔 그들이 알고 있는 프랑스 거주 한국인들의 흉을 보며 끝나는 그 모임에 마음을 붙이기 힘들었다. 한 번은 언니가 그 모임의 화젯거리로 등장한 적도 있었다. 대화 속에 등장하는 여자, 남자를 밝혀 남녀가 섞인 모임에서 항상 남자들하고만 이야기하려고 기를 쓰고, 유부남들이 술 마시는 자리라면 어김없이 껴서는 유혹하려는 듯 아양을 떨고 술을 따른다는 여자가 언니와 동일 인물임을 눈치챈 것은 그 이야기를 한 사람이 언니와 같은 대기업에서 파견 나온 주재원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카키색 샤 스커트에 겨자색 카디건을 걸치고 나온,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던 언니는 그런 오해를 받고 있었다. 언니의 시점과 그 여자의 시점은 판이하게 달랐다. 언니와 ' 나'가 함께 분개하며 속상함을 토로했던 그 일을 그들은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누군가 어색한 침묵을 깨고 아는 분이냐고 물었다.
사람마다 보폭이 다르고, 걸음이 다르듯,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가 느끼는 온도차와 통점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온도와 통점을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그게 정답이라도 되는 듯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 나는 그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언니의 통점과 주재원 아내의 통점은 달랐던 것이고 서로 다른 시각은 이러한 엄청난 오해로 파생되고 말았다. 다름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역지사지하는 평가는 늘 너무나 어렵다. 언니와 좋았던 한때는 언니가 유부남이 되어버린 옛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는 사실을 고백했을 때 “괜찮아요, 언니.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으니까요.” 그리 말했다. 그런데 ‘나’가 프랑스 남자 브리스와 결혼을 하고 약간의 삐걱거림과 이민자의 외로움과 완벽한 유배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자각이 들던, 그때 ‘나’는 언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있었다.
“언니, 아직도 그 사람한테 연락해?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
관계의 파국이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는 감정을 동반한 채 다가와 버렸다. 언니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던, 아니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나’의 감정을 ‘나’도 모르게 그렇게 쏟아내고 말았다. 충만했던 그때와 틈이 생긴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한 겹 너머에 있는 그 미묘한 갈등의 한 축은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불편하고 곤란하고, 예전에 좋았던 것이 지금은 어렵고 힘들어지는 감정의 소용돌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과도 같은 작은 실수가 용납되지 않으므로 마음의 파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백수린의 ‘시간의 궤적’을 읽고 나는 사라져 버린 관계에 대하여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들을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고 꼭 그랬어야만 했던 과정의 처음과 끝을 생각하고, 내면의 갈등과 작은 인과관계의 그 모호하고도 미묘한 갈등 사이의 작은 분열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한 발작 먼저 다가가면 될 것을 그리하지 못했고, 어색한 기류를 감당하지 못해 먼저 도망쳐버린 나의 몸짓과 눈짓의 그 어디쯤을 서성이며 너그럽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아름다운 면면으로 채워졌던 시간의 궤적을 열어놓고 마치 나를 보듯 화자인 ‘나’와 언니의 생각을 속속들이 펼쳐 읽었다.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 진다’는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듯 읽어보았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한 쓰라린 통찰을 경험해 본 적 있는가. 한때 좋았던 그녀는 이유 없이 나를 떠났다. 이유 없이는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축적된 서로 다른 삶의 패턴이 조금씩 마음에 금이 갔겠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어쩜 그녀도 나도 미성숙한 그때의 무지를 서로 탓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그녀도 그런 상태로 연락을 미룬 채 미적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족) 작품 속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기도 하여 화자인 ‘나’와 나를 병치하여 글을 썼다. 누군가의 험담을 들었을 때 “그 사람,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말해 본 적 있는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고개 끄떡인 적은 없는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며 아파하면서도 타인의 상처에는 태연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이미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