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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Sep 30. 2020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

최은영의 "씬짜오, 씬짜오"를 읽고


 “누가 베트콩인지 누가 민간인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저도 형을 잃었다구요.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잘못했다고 빌고 또 빌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세요?” 

 자신의 고통에 갇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빠였다. 이 사건은 그날 밤 아줌마와 우리 사이를 안전하게 갈라놓았다. 그건 서로를 미워하고 싶지도, 서로로 인해 더는 다치고 싶지도 않은 어른들의 평범한 선택이었다.


 이 작품은 화자인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는 독일의 플라우엔이라는 도시에서 생활하며 베트남인 호 아저씨네 가족과 가깝게 지냈다. 전쟁의 상처를 품고 있는 베트남 가족과 한국 가족이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도시에서 만나 ‘호 아저씨’네 가족과 ‘나’의 가족은 서로 음식도 나눠먹고, 주말이면 가족들이 항상 함께 어울려 지낼 정도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나’도 학급 친구인 ‘호 아저씨’의 아들 ‘투이’와 각별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전쟁에 대해 배울 때 선생님이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다행히도 대규모 살상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에 ‘투이’는 손을 번쩍 들어 선생님의 말을 끊는다. 

 “아닌데요?” 

 투이의 첫마디가 그랬다. 그리고선 “베트남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대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이모 삼촌 모두 다 죽었대요. 군인들이 와서 그냥 죽였대요. 아이들도 다 죽였고, 마을이 없어졌다고 했어요. 저희 엄마가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베트남 전쟁으로 자신의 가족들이 많이 죽었다고 말하는 투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고 한국과의 연관성 또한 몰랐던 ‘나’는 매우 당황한다. ‘나’는 베트남과 한국이 어떤 관계인지 몰랐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호 아저씨네 집에서 두 가족들은 만나고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어른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 자신이 아는 한국의 역사를 말한다.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 없어요.”

 ‘나’는 그 말을 하고 동의를 구하기 위해 엄마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는 아무 얘기도 못 들었다는 듯이 내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고, 엄마는 조용히 하라는 투의 눈빛을 보냈다. “국물이 짜지는 않은지 모르겠네.” 호 아저씨가 말을 돌렸다. 모두들 내 말을 무시하는 것 같아 서운했다. 


 “정말이에요. 우린 정말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요.” 


 한국은 선한 나라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어른들의 대화에 자연스레 참여해서 칭찬받고 싶었다. 난 맞은편에 앉은 아빠에게 인정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당연히 사실을 알고 있었던 어른들은 화제를 돌리려 했다. ‘나’의 아빠는 조용히 하라며 한국어로 소리쳤고 호 아저씨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한국 군인들이 죽였다고 했어.” 

 투이가 말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식탁의 분위기를 얼려 버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이 엄마 가족 모두를 죽였다고 했어. 할머니도, 아기였던 이모까지도 그냥 다 죽였다고 했어. 엄마 고향에는 한국군 증오비가 있대.”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충격적인 역사적 진실을 만난 열세 살의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때 ‘나’의 아빠는 호 아저씨네 가족의 고통은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저 전쟁이었고, 용병일 뿐이었고, 누가 베트콩이고 누가 민간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며, 이미 지난 일을 빌고 또 빌어야 되느냐고 날을 세웠다. 

 ‘응웬 아줌마’는 자신이 본 것을 아주 사무적인 어투로 냉정하게 확인시켜줬다. 

 “그저 구역질나는 학살일 뿐이었어요.”


 그 이유로 두 가족 사이 갈등의 골은 깊어져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다. ‘공부는 잘하냐, 왜 이렇게 키가 작냐, 커서 뭐할 거냐’ 물어보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는지, 바다를 가 보았는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색인지, 좋아하는 독일 음식은 무엇인지’ 이러한 것들을 응웬 아줌마는 나에게 물었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 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쇼코의 미소, p86)” 


 “아무것도 몰랐던 거, 미안해”

 ‘나’는 투이와 헤어지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두 가족이 그렇게 헤어진 뒤 17년이 지나 성인이 된 화자인 ‘나’는 독일로 호 아저씨네 가족을 찾아가는데 호 아저씨네는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몇 번이나 독일로 출장을 가면서도 나는 플라우엔에 들르지 않았었다. 기차로 두 시간 거리의 라이프치히에서 열흘 동안 체류했을 때도 나는 애써 그곳을 외면했다. 그곳에는 서로를 경멸하는 부모 밑에서 영혼의 밑바닥부터 떨던 아이가 있었고, 단 한 번의 포옹도 없었던 차가운 이별과 혼자 울던 길거리가 있었다.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 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 (쇼코의 미소, p89-90)


 성인이 된 뒤 ‘나’의 엄마는 세상을 떠나고 ‘나’는 엄마를 회상한다. ‘그 앤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우울했었지. 영리한 애는 아니었던 것 같아’ 큰이모와 작은이모마저도 엄마를 그런 식으로 회상할 뿐이었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하던 응웬 아줌마를 떠올렸다.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의 아빠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를 온기로 품어주던 응웬 아줌마를 생각하는 화자인 ‘나’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호 아저씨도 투이도 응웬 아줌마도 사려 깊고, 타인에 대한 깊은 온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그러한 깊은 유대를 가졌던 투이 가족의 넓고 깊은 품을 생각할 때면 화자인 ‘나’의 마음이 되어 슬픔과 연민 그리고 깊은 아쉬움이 밀려든다. 호 아저씨의 넉넉함, 응웬 아줌마의 섬세하고도 따뜻한 온기, 투이의 어른스러움, 어쩔 수 없이 등을 돌려야 했던 그 불편한 순간들이.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쇼코의 미소 p92)


 최은영 작가의 소설 ‘쇼코의 미소’의 핵심은 “열기보다 온기” 그리고 “유대와 연대의 감각”이다. 이 온기와 유대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 <씬짜오, 씬짜오>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플라우엔에 찾아가 호 아저씨네 가족을 만나 화해하는 부분이 나온다. 살아있는 동안 어떤 식으로 화해해야 할 것인가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30대 젊은 여성작가가 그리고 있는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진실과 대면할 것인가 의문을 던지는 작가의 감수성까지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하며 살까. 타인의 고통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쉽게 단정 짓고 내치고 품지 못한 순간들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 투이네 식구가 나의 가족을 반갑게 맞아 주던 일, 그 환대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 그 어떤 조건도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두 가족이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유대의 공기를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알아보고도 쉽게 곁을 줄 수 있는 사람, 누군가의 가슴에 따뜻한 사람으로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리라.  


 “투이와 함께 벽에 기대앉아 스누피 만화책을 읽던 그 시간도, 그 시간은 아직도 달콤하고도 씁쓸하게 내 마음의 좁은 수로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위태롭게나마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나의 부모와 상처 받았기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던 응웬 아줌마 부부가 서로에게 노래를 불러주던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쇼코의 미소, p91)”


*<씬짜오, 씬짜오>는 최은영 소설 <쇼코의 미소>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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