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음으로 책상 위에 올려 둔 폰에 파란 불이 반짝인 것은 수업 중일 때였다. 파란 불은 오래도록 반짝이다 끊어졌다. 이내 문자 한 통이 툭 올라왔다.
나 서울 왔다. 바쁘니?
언니는 종양수술 후 정기검진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오곤 했다. 일 때문에 진료를 마치고 곧바로 내려가는 일이 허다했다. 예고도 없이 올라와서 ‘검진 마치고 간다’는 문자 한 통을 남길뿐이었다. 자매의 대화는 단순했다. 단순하다는 건 그 너머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고 이해의 폭이 깊다는 의미이다. 언니는 고속버스를 타고 오르내리며 검진받는 일을 여행처럼 즐겼다. 바쁘니, 로 끝난 문자는 너의 도움이 필요해, 라는 뜻이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자마자 일원동 S병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쁘니?라는 말 속의 의미를 실행하고 있었다.
진료 끝났다 기다릴게.
올림픽공원 대로변 차창 밖은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흰빛에 가까운 연둣빛이었다. 키 큰 나무 둥치와 나뭇가지는 쭉쭉 뻗어 흰 속살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눈부시게 반짝였다. 도열한 의장대처럼 늠름하고 씩씩했다. 천지간 꽃잎 흩날리더니 어느새 꽃은 다 지고 초록 숲을 이루어가고 있구나,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놀라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언니는 정문 앞에 나와 있었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는 모습은 진료를 마친 환자가 아닌 여행자 같았다. 어딘가를 바라보며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 속에 갇혀 있는 순간을 깨고 싶지 않았다. 들키지 않고 그 모습을 오래도록 훔쳐보고 싶었다. 몰래 사진도 한 컷 찍고 싶었다. 신호등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상념에 젖은 언니를 깨우듯 불러 세우는 일이 아쉬웠다.
언니를 태워 한국 체대를 지나 올림픽공원로 플라타너스가 길게 도열한 그 길을 다시 빠져나왔다. 햇살에 반짝이는 4월의 플라타너스 새순은 아침 강가의 윤슬 같았다.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파라다이스 빔’이 이런 건가 싶었다. 종일 눈부신 봄날의 나무를 느껴야만 할 것 같았다. 도심의 플라타너스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어릴 적 수없이 보아 왔던 그 봄날의 나무를, 그 냄새와 빛깔까지 훅 밀려들었다. 그때와 지금을 연결 짓는 순환의 고리 같은, 고목이 품어내는 깊음은 그 근원을 보는 듯했다. 나무가 자라온 시간, 나무가 살아온 세계가 뭉클 가슴에 와닿았다.
어디쯤 오고 있니?
오빠의 문자였다. 오빠는 환자이다. 그런 오빠가 여동생 둘을 기다리고 있다. 각별히 유의해야 할 ‘B형 간염 보균자’ 상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문제였다. 간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 제 기능을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더는 치료 방법이 없어 마지막 보류인 간이식만을 남겨두었다가 조카의 간증여로 이식을 받고 휴식 중에 있었다. 수술은 성공이라 했지만 그간의 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오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며 미처 다하지 못한 형제애에 마음을 쓰던 때였다. 지방에 사는 언니는 정기검진을 받으러 온 날에 겸사겸사 오빠를 만나려던 것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아픈 오빠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고 있었다. 셋은 서로 도와 밥상을 차리고 국을 데워 늦은 점심을 먹었다. 출근한 올케언니가 만들어 둔 반찬은 모두 오빠를 위한 메뉴였다. 오빠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고, 언니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빠를 위한 메뉴라 하겠지만 올케언니는 갖은 봄나물과 시누이들을 위한 두어 가지 반찬을 더 만들어놓고 출근한 것 같았다. 삼삼한 나물들 속에 낀 톡 쏘는 파김치와 갓김치는 우리를 위한 올케언니의 배려였다. 특히 쌈 채소와 쌈장 맛에 감탄하며 쌈을 쌌다. 오랜만에 만난 남매는 유년의 엄마 품을 그리듯 옛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곱고 여린 플라타너스 새순처럼 예쁘고 순한 남매였던 때를 앞다퉈 꺼내놓았다. 토닥토닥 싸우기도 했던 남매였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뭉클 사무쳐오기도 했다.
더 빨리 이런 시간 좀 마련할 걸….
남매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일,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차려진 밥상에 둘러앉아 옛이야기를 나누는 일, 그때를 회상하며 오롯한 추억을 늘어놓는 일은 만면의 주름살을 펴는 일이었다. 우리 남매의 긴 세월의 메시지를 생각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나무의 순환을 생각했다. 나무가 색깔과 빛으로 냄새와 느낌으로 우람하게 풍경을 펼치며 살았듯, 쉽게 위로하지 않고 서둘러 웃지 않아도 돈독한 시간은 배경을 이뤘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걸어왔던 수많은 거리와 비 오고 바람 불던 날들이 모여 여기 지금 이 순간과 맞닿았다는 것. 무던하게 견뎌낸 날들은 때때로 얼룩과 무늬를 남기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무심결의 하루가 긴 세월을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시간의 힘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인 줄 알았는데 그 시간은 적당히 현재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흐르는 시간 속에 있었다. 깊이와 넓이를 조절하며 그렇게 서 있었다. 사계를 보내는 나무가 흔들리며 그 거리에 풍경을 펼쳐내었듯, 삶이란 우연한 날들이 모여 여기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