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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Jan 26. 2019

만져지지 않는 것들

지난했던 시간




 멈춰! 지금 여기 멈추라고!

 멈추라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달려갔다. 두 번째 외침에야 그는 후진을 하여 그 자리를 찾아 멈췄다.

 거기 무성한 잡풀 사이 돌계단 아래 도랑을 이루며 졸졸졸 물이 흐르고 있었다. 길을 가로질러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자동차도 그 물길을 첨벙 대며 달려갔다. 하마터면 2억 원의 가치를 잃어버릴 뻔했다. 여름이었다. (언젠가 초딩이던 둘째가 아름다운 차창 밖 풍경에 취해 얼른 보라고 소리쳤지만 우리 중 아무도 그걸 못 보았다. 그때 아이는 2억 원의 가치를 잃어버렸다며 애석해했다.)


 여름 한 철, 길을 가로지르며 흘러가는 물줄기를 본 적 있는가. 작은 도랑이 넘쳐 신작로 위로 흘러드는 철 모르는 물길을 본 적 있는가.

 장마가 지나고 나면 길 위에 제멋대로 흘러가는 물길이 있다. 장마가 만들어낸 물줄기이다. 그 맑은 물이 웅덩이를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첨벙첨벙 물살을 가르며 걸어야 마땅하다. 여름이어야 볼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원시적인 풍광이다. 스스로 흔적을 남기며 말을 거는 자연의 말을 못 들은 척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것은 자연에의 초대에 불응하는 처사이고 또한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자연의 언어는 너무나 섬세하고 완벽해서 눈물겹다. 그 어떤 수식어로도 흡족하지 않을, 마음속에 길을 내고 그림을 그리는. 그래서 좋다 좋다 너무 좋다 그 말만을 되뇌게 하는. 자연이 사람이고 사람이 자연일 수밖에 없는. 우연한 여행길 어느 신작로에서 일어나는 그 일. 첨벙첨벙 물과 흙과 나무와 바람과 하나가 되어버린 뚜렷하게 만져지지 않는 길 위의 풍경을 나는 사랑한다. 그대로 흙에 흡수되어 자연이 되는 일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봄이었다. 아마 다섯 시쯤 집을 나서 마트에 다녀왔던 것 같다. 된장찌개를 끓이려니 두부 한 모가 필요했다. 왜 하필 그때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는지. 급하게 두부 한 모를 사서 달랑달랑 들고 오다가 집 앞 느티나무 그늘 아래 앉았다. 하늘은 맑고 투명한데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펼쳐진 느티나무 어린잎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하늘 향해 고개 들고 폰카를 들이대며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사진은 나무만 찍은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찍어냈다. 팔랑 내 치마 자락에도 푸른 물이 들어버릴 것 같은 그 순간, 문득 신월3동 계단을 타고 올랐던 그 좁은 셋방이 떠오르는 거다. 벽면 가득 색연필로 4B연필로 그어놓았던 낙서와 그림들이며. 반쯤은 걷어 올린 헐렁한 내의 차림의 아이, 벽을 향해 무언가에 몰두하던 아이의 뒷모습이 하필 그때 그 순간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르는 거다. 어린 느티나무 이파리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팔랑이는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나를 멈춰 서게 했다. 이사하던 날 벽면에 새겨진 내 아이의 낙서와 그림을 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아야 했던 그 장면까지도 판화처럼 거기 떡하니 펼쳐지는 것이다. 마치 어린 내 아이의 영혼을 거기 고스란히 두고 떠나는 것 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기억들까지도.

 저녁을 지어야 하는 것도 잊은 채 나무 아래 벤치에 텁석 주저앉아 어두워질 때까지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지난했던 그때의 시간들이 아스라이 펼쳐졌다. 복닥거리며 흔들렸던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는 것이 퍽이나 아름다웠구나,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왜 갑자기 달려가는 차를 세웠으며 그 하찮은 물줄기며 잡풀이 무성한 돌계단에 넋을 놓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런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인지….

 거기에 멈춰진 나의 시간이 있다는 걸 몇 사람이나 눈치챌 수 있을까. 도로를 적시는 맑은 물길에, 낯설고도 따뜻한 골목의 흙냄새에, 벽면에 그어진 하찮은 낙서에 깊고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멈춰진 그 시간에 나를 끼워놓고 가장 정직한 내면의 말에 귀 기울이는 나의 마음을 그저 철없는 센티멘털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는다. 그저 작은 자연이 되어 자연의 속도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모으는 것뿐이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 시간인지 잊어도 될, 잊어야만 하는 시간이라고. 오직 그 순간만큼은 가장 정직한 내면이 되어 나를 살핀다는 것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을. 길을 가는 것도 미룬 채, 밥을 짓는 것도 잊은 채, 거기 멈춰진 시간에 주저앉아 몽상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는 감성을 나도 나를 어찌할 수 없다. 만져지지도 않는 것들을 어루만지며 골몰하는, 때때로 그런 시간이 내게 필요할 뿐이다.

 우연을 기다리는 힘 시간을 견디는 힘이란 그렇게 문득 찾아드는 것이라고. 축복처럼 그 순간을 맞이하면 되는 일이라고 그저 그 순간에 흠뻑 빠지면 되는 일이라고 애써 고개 끄덕인다.  


 



 “가장 즐거운 날은 굉장하거나 근사하거나 신나는 일이 생기는 날이 아니라 목걸이를 만들 듯이 소박하고 작은 즐거움들이 하나하나 조용히 이어지는 날이라고 생각해요.”(루시 모드 몽고메리 ‘에이번리의 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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