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좋은 친구였다
비는 쏟아지고 그치고를 반복했다. 카페 안은 빈자리가 없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마치 배석된 듯 조화로웠다. 폭우 때문인지 실내는 비교적 조용했다. 묵중한 웅성임이 있었지만 빗소리에 묻힌 것인지 짙은 커피 향과 빵 굽는 냄새에 밀린 것인지 적당히 평온했고 안정감이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깊이 출렁였고 폭우 속 파도의 질감은 순탄했다. 우울하지도 어둡지도, 유쾌하지도 밝지도 않은, 비 오는 날의 바닷가 카페는 겨우 한 자리를 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자리를 내어주고 기다리고, 또 한 자리를 내어주고 기다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사람들은 드나들고 있었다.
오래도록 카페에 앉아있었다. 바람도 없는 거센 빗줄기를 바라보며 사진을 몇 컷 찍었고, 여행객들로 빽빽한 카페에서 이 많은 사람들은 무얼 하나 지켜보고 있었고, 하필 이 복잡한 카페에 와서 나는 잠시 빈둥대고 있었다. 한적한 바닷가 카페를 기대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비가 내린 탓이었다.
가자! 그는 테이블 위 휴지를 치우며 일어섰다. 나는 남아 있는 커피를 마저 마셨고 남아 있는 빵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비는 그치는 듯했다. 커피를 마시고 빵을 먹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돌아봤다. 절반은 폰에 집중했고, 절반은 주변을 의식하며 뭔가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았다. 조용히 오랜 시간 빈둥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빵빵한 에어컨 때문에 너무 추웠고, 실내는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남은 빵을 포장했다. 빵 봉지를 앗아 든 그가 나의 손을 이끌며 앞서갔다. 따뜻했다. 손과 손을 타고 전해지는 그 무엇이 있었다. 뭔지 모를,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 무엇이 내 안에 풍성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서로를 읽어낼 수 있는 깊이까지 도달한 것이라면, 그건 시간이 준 선물이었다. 전혀 다른 서로가 만나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 같은 그 무엇이 마음에 새겨지고 길 위에 새겨지고 묵중 하게 출렁이는 바다에 새겨지고 있었다. 삶의 흔적은 그렇게 고스란히 몸짓에 새겨지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는 친구니까 닮았지? 친구는 원래 닮는 거야.”
“그럼 엄마랑 나도 친구야? 엄마랑 나도 닮았잖아.”
예닐곱이던 큰애와 언젠가 나눈 대화가 문득 생각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늘과 바다는 닮아 있었다. 짙은 먹색 구름이 둥둥 떠 있는 하늘과 일렁이는 먹빛 바다가 닮아 있었다. 하늘과 바다가 왜 닮았느냐고 그 이유를 나는 나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는 친구니까 닮았지! 아이의 질문에 무심결에 대답하던 나의 목소리가 다시 내게로 전달되었다. 그렇지. 친구니까 닮은 거지. 하늘이 회색일 때 바다도 회색이고, 하늘이 파란색일 때 바다도 파란색이고, 하늘이 붉은색일 때 바다도 붉은색이 되는 거지. 그래서 하늘과 바다는 친구야. 좋은 친구는 닮는 거야. 아이에게 환희 웃으며 대답하던 그 풍경이 파도처럼 내 안에 넘실댔다. 나와 아이 사이에 그런 아름다운 날들이 있었다는 것이 웃음 짓게 했다. 그간의 간극을 비교할 수 없는, 나의 몸도 아이의 몸도 세월을 장식한 채 묵중한 바다 위로 아른거렸다.
언제 이렇게 시간은 흘러 버렸지? 언제 나는 이렇게 나이를 먹어 버렸지?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 힘들어, 얼른 커라 얼른 커라 주문처럼 외던 날들이 있었다.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커가는 것이 아까운 날들도 있었다. 짝사랑했던 시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다 커버린 아이들을 두고 나온 홀가분한 길 위에서 인생이라는 숫자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고 있었다.
그런 우울한 나날이 아마 오래 지속되었나 보았다. 이 먼 바닷가 카페까지 와서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그래 맞다. 인생을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자고 나선 길이었다. 그도 나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나의 손을 끌어당기더니 지그시 손바닥을 눌렀다. 나의 마음을 눈치챈 것이었던지, 그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 혼자가 아닌 우리는 둘이었다. 함께 만들어 온 세월의 흔적을 지그시 누르며 걷고 있었다. 카페를 벗어나 우리는 오래 걸었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카페에 우산을 두고 너무 멀리까지 걸어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빗방울이 커졌다. 뛰기 시작했다. 나의 손을 잡고 앞서 뛰는 그에게 이끌리듯 따라 뛰어갔다.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움직임이 달랐다. 몸이 뛰는 것과 마음이 뛰는 것이 달랐다. 젊은 우리는 저만큼 앞서 뛰어가고 늙은 우리는 뒤따라 뛰어갔다. 하늘과 바다가 닮은 것처럼 우리도 닮아 있었다. 뒤뚱대는 것까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며 그동안 닮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좋은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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