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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Jan 31. 2023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강북구(7)

서울 25개 구 길 위의 역사-구경(9경) 시리즈



2022년 월드컵, 덕분에 고단했던 한 해가 행복했다. 끝날 때까지 흥미진진한 이변의 연속도 볼만했지만 무엇보다 대한민국 대표팀이 16강에 위업을 달성하며 모든 것을 잊고 열광할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지 않았던가.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한국대표팀은 또 하나의 감동을 덤으로 주며 애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월드컵 16강을 치르러 나가며 한국대표팀을 이렇게 외쳤단다. 물론 이 말은 처음 프로게이머 데프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고, 데프트가 만들어갔던 역전의 서사로 생명력이 더해져 유행어가 됐다. 월드컵 한국대표팀 덕분에 이 말은 한 번 더 유행을 탔고, 2023년 새해를 맞이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지표가 되었다.   


그런데, 아는가? 100년도 더  전에 이 말을 남긴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는 16강 진출보다 더 중대한 '특명'을 안고 조국을 떠났으나,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은 그 사람을 만나러 가 본다.  



꺾이지 않는 마음

만좌부절 (萬挫不折 : 만 번의 좌절에도 꺾이지 않는)



"만좌부절하는  자주독립심은 천만의 강병으로도 깨칠 수 없는 것이다." - 이준열사의 어록에서

 

많은 사람이 알겠지만 이준열사는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였다. 

"국제법에 입각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라."

이준에게 내려진 특명이었다. 


44개국이 참가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네덜란드 헤이그로 가는 여정은 길고 길었다. 무려 64일이 걸렸다. 가는 길이 멀기도 했지만, 일본의 감시를 피해 행로가 노출되지 않아야 했으며 다른 두 명의 특사와 합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준은 서울을 출발, 부산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그곳에서 또 한 명의 특사 이상설을 만나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탄다. 그리고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과 합류, 헤이그로 향한다. 그들의 임무는 이러했다. 


-이   준 : "대한제국 초대검사로 국제법을 근거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밝히라." 

-이상설 : "전 의정부 참찬으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던 현장을 목격했으니 그 불법성을 생생히 증언하라."

-이위종 : "전 러시아공사관 참서관으로 외교와 외국어에 능통하니 특사로 외교활동을 행하라."


특사 3인이 첫 번째로 한 일은 숙소에 태극기를 거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대표로서 외교활동의 개시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장'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의 사전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약소국의 처지에는 관심 없는 강대국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만좌부절 萬挫不折'

 

회의장 문턱을 넘지 못한 특사들은,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다. 

회의장 안으로 갈 수 없다면 밖에서 특명을 실행한다. 

외국어가 능통한 23세 청년 이위종은 회의장 앞에서 피 끓는 연설을 시작한다. 


"대한제국의 대표인 우리는 법과 정의와 평화의 정신을 찾아 헤이그에 왔다. 그런데 세계 평화와 정의를 도모하고자 모인 이곳에서 세계대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대한제국은 제외시키는가?"


이위종의 연설은 대한제국의 절박한 사정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평화와 정의의 기치아래 모인 기자들이 움직였다. 

기자들은 특사들의 활동을 신문지상에 보도하기 시작했다. 

특사들의 열렬한 활동은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제국에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독립국가인 대한제국은 각국과 우호관계가 일본에 의해 파괴되고 동아시아 평화가 끊임없이 위협되는 것을 열강들은 방치할 것인가?"


이준열사 묘역 : 헤이그 공동묘지에 묻혔던 이준열사는 반세기가 넘어서야 이준열사는 고국으로 돌아와 태극마크 아래에 묻혀 있다

국제기자단이 초청한 자리에서 이위종은 이렇게 연설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대한제국 정부에 황무지를 50년 동안 양도하라고 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와 대포를 동원해 궁궐을 에워싸고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대신들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도 위협과 협박, 대신을 감금하면서까지 체결한 '늑약'이었다.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사람이 기관총구 앞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한 극동의 평화는 있을 수 없다."

- <한국을 위하여 호소함(A Plea for Korea)>, The Independent, 1907년 8월호).


이위종의 호소는 세계 각국의 기자들을 감동시킨다. 국제기자단은 만장일치로 대한제국을 돕기로 하며 여러 신문에 연설문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는 가열되는 식민지 경쟁에서 각국의 군사비 조정을 위해 만난 것이었다. 약소국 대한제국의 사정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대한제국은 축제 속에 '비참하게 사라져 가고 있는 뼈다귀 하나'인 처지였고, 특사들의 활동으로 이끌어낸 언론인의 관심은 '커피 포트 안의 작은 소용돌이'가 되고 만다. 이런 고독한 외교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던 이준은 1907년 7월 1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그래도 꺾이지 않았던 마음


이준의 장례식은 가족도 없이 조용한 침묵 속에서 치러진다. 

이상설은 자신의 생명이 끊어진 듯 통곡했고,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로 갔던 이위종은 급히 헤이그로 돌아온다. 


그리고 5일 후 그들에게 기막힌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되었고, 특사 3인은 '특사사칭죄'로 기소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7월 20일, 특사 3인이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이 열렸다. 


"이상설 사형, 이준과 이위종 종신형"


조선통감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법부를 위협해 특사 3인을 '특사 사칭죄'로 기소하게 하고 이렇게 선고하게 한 것이다. 이 선고로 특사였던 이상설, 이준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영원한 망명객이 되고 만다. 


"만좌부절"


그러나 그들은 꺾이지 않는다.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그곳에서 새로운 길을 시작한다.  

그들이 간 곳은 미국이었다. 

'어느 한 나라가 제3 국과 문제가 생겼을 경우, 상대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태해결을 위해 돕는다'

1897년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에는 '거중조정'항목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것을 근거로 미국의 협조를 얻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특사 2인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가쓰라-태프트조약' 때문이었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묵인하기로 약속한 조약이었다. 


"만좌부절"


그들은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외교활동을 펼친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온다.  이상설은 신채호, 홍범도, 최재형 등과 함께 독립군 활동을 위한 터전을 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탄생한 신한촌. 신한촌은 1만 한국인들이 살았던 곳이며, 그곳에 한국인들의 중심이자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된다.


2년 후,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총성 세 발이 울린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다. 안중근의사와 그의 동지 우덕순은 '권업회' 산하 '동의회'의 회원이었다.  


헤이그 특사 이상설은 바람처럼 떠돌며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다 1917년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가에서 생을 마감한다. 헤이그 특사 이위종은 연해주 의병활동에 참가했다가 러시아제국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활동을 했으나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종묘사직과 함께 순사(따라 죽음) 하십시오."

이상설은 '을사늑약'을 맺고 나자 고종황제에게 감히 이렇게 상소했다. 

그러나 황제는 죽음으로 맞서지 못한다. 

특사들은 사형, 종신형으로 영원한 망명객이 되어 모두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얼어붙은 땅, 시베리아의 별이 되었으나 고종은 1919년 68세까지 경운궁(덕수궁)에서 살다가 세상을 뜬다.    


이준열사묘역-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모셔와 이곳에 안장했다. 왼쪽에는 헤이그 묘소를 본뜬 묘가 있고, 오른쪽에는 고종황제의 친필 위임장이 새겨져 있다. 


헤이그특사를 실패한 외교전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꺾이지 않았던 발걸음은 실패하지 않은 역사를 보여준다.  

독립군들은 7월 14일을 기념일로 삼고 광복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준열사가 세상을 뜬 바로 그날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근거지는 만주와 연해주였다. 

이상설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기둥이자 거목이었다.  

그가 뿌린 씨앗은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에서 명동학교로, 

연해주에서 망명정부 '대한광복군정부'로, 한국인들의 활동거점 신한촌으로, 

권업회로, 동의회로,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의거로 이어진다.


헤이그특사가 머물던 호텔은 이준평화박물관으로 재탄생하며 한국의 역사문화영토로 지켜내고 있다



-사피엔스 스튜디오, 심용환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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