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영감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십대 시절을 탕진하고 가까스로 헤어나온 곳엔 스무살. 수용소 같던 고등학교를 떠나 마침내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들에게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두렵고 의심스럽기만 했다.
그리하여, 이 험난하고 우스꽝스러운 세상 속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망가뜨려버린 빛나는 청춘-보들레르와 잔느 뒤발, 달리와 갈라, 로세티와 레지나, 이상과 금홍- 예술가와 그의 뮤즈에게 매료되었다.
일생의 역작을 빚어낸 아티스트들의 멋드러진 본새 뒤로 타고난 아름다움을 불태우며 제맘대로 살다가 약물중독, 자살, 전염병으로 일찌기 떠나버린 그녀(때로는 그)들.
우아하면서도 신선해야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도 파괴적인 작품이어야 했다. 그 정도 레벨의 작품이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주제넘게 눈만 높았던 그 시절. 다행히 엄청난 재능이나 진득하게 인내하기 위한 자신감이 내겐 없음을 금방 깨우쳤다. 천재적인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자각의 다음 수순으로 예술가들의 뮤즈, 작가들의 대상이 되겠다는 게으른 망상을 꿈으로 삼았다.
몹쓸 상상력으로 시동을 걸고, 잔머리를 엔진 삼아 집요하게 노력한 끝에 당시 문학상을 휩쓸며 한국 문단의 주목을 받던 한 작가의 애제자가 되는데 성공 하였다. 아내가 여행을 간 동안 키우는 고양이를 보러오라는 초대를 받고 온몸 끝이 짜릿하였으나, 막상 디데이가 다가오자 불안이 충동을 막아섰다.
나는 함부로 막 살아도 모두 용서될 정도로 절세 미녀가 아니었고, 보수적인 경상도 가정의 착한 딸로 자라 일탈에 대한 죄책감이 컸으며, 무엇보다 위험한 모험에 몸을 내던지기에는 겁이 너무 많았다.
천재작가와 뮤즈되기로 젊은 날을 탕진해버리고 서른을 바라보던 어느날, 뜨겁게 불타며 소멸하기에 이미 너무 나이들어버렸다는 걸 인정했다.
이제 그동안 안 해본 것을 해야 했다.
매일의 습관을 점검하고 스스로 칭찬하기.
평생 나와 함께일 내 모습을 단정히 다듬기.
주변 사람을 대하는 내 말과 행동을 돌아보기.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 책임을 인정하고 살피기.
주어지는 결과보다 순간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기.
인내하고 침착하기 힘든 순간엔 다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실패한 날엔 내일이 있다고 다독거리고, 뿌듯한 날에는 매일의 걸음으로 이뤄낸 결과임을 잊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잘 씹어 소화시켜 보았다.
헤어진 뒤에도 고마울, 나를 한 뼘 키워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키우게 되었다.
누군가와 아주 가까이에서 일상을 함께 하고, 내가 맺은 관계를 책임지는 일은 때론 성가시고 고달프기도 하다. 그러나 문득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다, 운전을 하다가, 숲길을 걷다가 단단한 끈으로 연결된 내 사람들이 떠올라 나는 웃거나 울게 된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고 가끔 글로도 옮겨 적는다.
별 재능은 없지만 창작이 즐거운, 이따금 예술가가 되는 나.
치명적인 매력이 아닌 은근한 온기로, 영감의 보따리를 덥썩 안겨주는 내 가족과 친구들.
어느새 나는 그들의, 그들은 나의 뮤즈가 되고 예술가가 되었다.
하루하루를 뜨겁고 진하게 살며, 무엇보다 내가 나를 가르치고 깨우치고 미워하면서도 또 사랑하고 싶다.
내 삶이 나의 뮤즈가 되길 바라며, 내 안의 뮤즈를 내가 아끼고 써주길 기대하며, 치명적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