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희의 그림책, <도토리시간>을 읽다.
미친 사람들.
작가들만 만나고 오면 이런 생각이 든다. 글에, 그림에 제대로 미치지 않으면 예술은 탄생을 거부한다. <도토리시간>을 그리고 쓴 이진희라는 한 사람이 완전히 미쳐버렸기에 우리는 이 걸작 중의 걸작을 곁에 두고 음미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솔직히 처음에 작품만 봤을 때는 그다지 매료되지 않았다. 느린 템포의 사람이 아니기에 급한 성미의 소유자인 나에게 <도토리시간>은 느긋해지라고 교훈을 주는 것 같아 불편했다. 그런 내가 <도토리시간>의 이진희 작가를 만나고 와서는 작품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이런 명작을 직접 소유하고 있고, 곁에서 아무 때나 펼쳐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까지 느껴진다.
이진희 작가, 이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오롯이 그림 그리는 작업에 그녀의 일상 전체를 바쳤다고 했다. 도무지 그 일상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쳇바퀴 도는 듯한 나날들, 나는 변하고 있는데 과거의 글에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 많은 욕구들을 포기하고 세상을 차단하며 작품을 채울 그림을 한 장씩, 한 장씩 그려 나가는 도토리 시간들. 이런 시간들의 느낌을 감히 잡을 수조차 없었다.
책이 책이 아니다. 만 칠 천 원밖에 안 내고 나는 이진희라는 사람이 1년 동안 바쳤던 영혼을 샀다. 그녀의 고뇌와 환희, 기쁨과 슬픔, 절망과 염원, 피, 땀, 눈물까지도 다 샀다.
1년 동안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자신을 완전히 바쳐 만든 책이 세상이 나왔는데도 정작 그 사람은 상당한 공을 타인에게 돌렸다. 디자인을 담당한 워크룸의 탁월한 심미안과 책임 편집자 글로연 오승현 대표의 감각과 인내심에 감사함을 표시하고 또 표시했다. 그녀의 겸손한 마음에 또 한 번 반했다. 은유의 <출판하는 마음>을 통해 읽었던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접하니 그들이 궁금해진다. 작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1년을 기다려준 사람들의 이야기도 직접 만나 듣고 싶다. 미친 사람이 완전히 미칠 수 있게 기다리고 기다려준 사람, 진정 이 작품의 숨은 예술가이다.
나는 1년을 온전히 작품을 위해 은둔할 수 있을까? 1년은커녕 일주일도 못 하겠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지 않나. 나도 나름대로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진희 님을 만나고 오니 미치기엔, 작가가 되기엔, 나의 미침은 한참이 모자라다.
오늘도 몇 번이나 이 그림책을 넘기고 또 넘긴다. 이진희의 영혼이 나에게 와, 내가 견뎌낼 수 있는 도토리시간에 대해 묻는다. 견딜 수 있겠니.
이진희 님의 도토리시간 뒤편에 앉아 가만히 기다려준 숨어 있는 다른 두 사람도 떠올려본다. 내가 걸어갈 도토리시간을 무한 지지해주는 오늘 만난 책 친구들의 얼굴들이 겹친다. 그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내가 걷고 있는 도토리시간에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당신들이 견뎌낼 도토리시간에도 내가 함께 할 거라고.
저마다의 도토리시간이 고요히 흐르고 나면 우리는 함께 하늘을 봐-이진희, 도토리시간, 글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