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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각오에 불과하더라도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다른 마음

by 마음은 줄리어드

오랜만에 제주 여행을 가는데 3박을 하러 가니 하루도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어서 바이올린을 꼭 가져가고 싶었다. 그래서 짐칸에 실으려는데 남편의 극구 반대로 결국 못 싣고 왔다. 여행 가면서 무슨 바이올린이냐고.

그런데 차에 타보니 짐칸이 생각만큼 빡빡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서운했다. 바이올린 케이스가 작지 않은 크기긴 하지만 아내가 좋아하는데 좀 실어주면 안 되나.

'그래도 딸의 바이올린만큼은 크기가 작아 허락이 떨어지고 사수를 했으니 그거라도 붙잡고 연습을 할 테다. 그리고 암보라도 미리 하면 되지.'


여행 출발 전 나의 당찬 각오는 사실상 각오에 불과했다. 10월에 때아닌 여름 날씨로 온 가족이 물놀이를 하다 보니 숙소에 오면 피곤해 쓰러지고 말았다.


3박 4일의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집에 도착한 시각이 밤이 늦어 악기를 켤 수 없지만 나는 또 각오한다. 내일 열심히 연습해야지. 뭐 이것도 또 각오로 끝날 지도 모르겠다. 어김없이 밥 세 끼도 해야 하고 아이들 일정도 관리해야 하고 이사 가는 일정 때문에 인테리어 상담도 가야 하니 내일도 악기만 연습하도록 한가하기엔 이미 틀렸다. 내일 연습을 열심히 하겠다는 당찬 포부, 오늘도 품어본다. 음악에 빠진 이후로 다시 내일 떠오를 새 하루를 설레며 맞이한다. 만성 우울증 환자에게 다시 시작될 하루는 달력 속 그저 그런 하루일 뿐이었는데 새로운 열정이 생긴 후 하루가 그냥 맞이하는 그런 하루가 아니다.


내가 음악을 애정할수록 음악이 내 삶에 깊이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는 삶이 우리가 글을 쓰거나 연기하거나 음악을 하는 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라요. 우리의 재능이나 예술성도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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