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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Oct 22. 2021

내가 누군지 말해줘요

이런 날에는 이런 향기

심리테스트를 좋아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타인의 말을 듣는 게 재미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게 내가 아닐 때 그 말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말들에 은근히 중독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정신 차려"라고 말하는 듯한 책의 한 구절을 만났다.


MBTI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성격 검사들은 '오늘의 운세'만큼이나 과학적 타당성이 없다. 수년간의 증거에 따르면 MBTI는 그 검사가 주장하는 것에 부응하지 못하며, 업무 성과를 일관되게 예측하지도 못한다. (중략) 검사 결과를 받아보면 왜 전부 사실처럼 느껴질까? 왜냐하면 그 검사들은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란 그 신념들을 요약해서 당신에게 돌려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와! 진짜 딱 맞네!"

리사 펠드먼 배럿, <이토록 뜻밖의 뇌과학> 중에서


많은 심리 검사나 테스트들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바로 나라고 말해준다.

그것이 나의 내면에서 나오는 바람이라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도 헷갈리니. 하지만 대부분 이런 검사나 테스트에서 말하는 나의 모습은 나의 표면을 둥둥 떠다니는 생각과 욕망들이다.


아로마 인사이트 카드 상담에서 카드를 배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카드 3장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감정 상태에 대해 확인해보는 것과 카드 11장으로 좀 더 깊이 나의 감정을 살펴보는 것. 평소에는 카드 3장을 뽑아 나의 감정 상태를 살핀다. 그러다 감정이 심하게 요동치는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나를 옭아매는 날이면 11장의 카드를 뽑는다. 1번부터 11번까지 카드마다 가진 의미가 다르다.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9번 카드에 이르면 '글쎄'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8번 카드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9번 카드는 '타인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말해준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매번 다른 카드가 나오더라도 '그렇지.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지'라고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문제는 9번 카드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은 내 속도 모르고 이렇게 말하더라'는 생각이 툭 튀어나오게 만드는 카드들이 꼭 이 자리에 있다. 11 카드 상담을 받는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긴 해요. 내가 아닌데 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잘 알겠어요?"



그럴 때 사람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타인이 보는 자신의 모습이 더 진실에 가까울 때도 있어요. 내가 나를 바라볼 때는 '생각'이라는 필터를 거치죠. 하지만 타인이 보는 자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걸러내지는 못해요. 의식에서 걸러내지 못한 무의식의 모습들이 예고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아무런 거름망 없이 보게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닌 타인이에요."


그렇다고 이 말이 모든 상황에 다 맞는 건 또 아니다. 사람은 '투사'라는 걸 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 왜 저래?"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사실은 자신의 모습임을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투사'를 알아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인생에 찾아오기도 한다. 나에겐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지금이 바로 그런 시간이다. 딸의 어떤 행동에 유독 화가 날 때가 있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해 화를 터뜨리기도 하고 잘 참아 넘기기도 한다. 매번 나의 반응은 다르게 표출되지만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알게 되는 건 같다.

'나도 저 나이 때 저랬는데, 어쩜 이렇게 닮았니?'

나와 닮은 딸의 모습에 격한 감정이 일렁이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어떤 면을 딸에게 투사하기 때문일테다. 투사는 타인의 모습을 왜곡한다. 타인의 모습에 자꾸만 자신이 거부하는 자신의 모습을 덧씌운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지?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도 의식의 필터를 걸러낸 것일 뿐 온전한 내가 아니고,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도 그 사람의 투사로 얼룩져버리면 진짜 나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야?

여기까지 데리고 와 놓고서 '나도 잘 몰라요'라고 말한다면 너무한가?

그런데 정말 잘 모르겠다.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게 있으려면 언제나 변함없이 고정된 실체가 내 안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내가 경험하는 나는 매번 다르다. 사십 대 중반의 내가 이십 대 시절 나를 보면 이미 지난 시절인데도 그땐 왜 그랬을까 싶은 것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때는 너무 당연해 보였던 게 지금은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게 아주 먼 시절에 대한 것만도 아니다. 좀 전의 내가 진짜 내가 맞나 싶은 순간도 꽤 있으니 말이다.

감정이라는 놈은 또 어떤가? 속마음은 그게 아닌데 화를 낼 때도 있고, 속에서는 천불이 나면서 웃고 있는 나를 볼 때도 있다. 그나마 내 속이 어떤지 알면서 겉으로 다른 모습을 보일 때는 내가 나를 토닥여줄 수 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감정 뒤에 숨은 속마음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을 때도 있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마음이면서도 말이다. 표정 뒤에 숨긴 나의 마음을 내가 부정할 때도 있다. 뻔히 알면서도 내 감정은 그게 아니라고 최면을 걸다 보면 진짜 내 마음을 망각하게 된다. 그 상황에서는 그게 편해서 진짜 감정을 숨기고 가장 편한 감정을 밖으로 꺼내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몇 번 반복되다 보면, 오랜 시간 지속되다 보면 상황이 바뀌어도 엉뚱한 데서 꺼내온 가짜 감정이 진짜 감정 행세를 한다. 그땐 이미 나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게 되어 버렸으니까.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나에게 진짜 나의 모습을 알려줄 특별한 방법이 있을 줄 알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명리학과 주역을 공부했던 적도 있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컬러 세러피를 배우기도 했다. 아로마세러피라면 그 답을 알려줄까 싶어 아로마테라피스트가 되기도 했다. 숨바꼭질의 술레라도 된 듯 꼭꼭 숨어있는 나를 이렇게 열심히 찾아다녔으니 뭔가 대단한 걸 알아냈을까?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알아낸 건 '별 것' 아닌 것들 뿐이다. 어떤 생각이 머리를 휘저을 때 '그건 사실이야? 나의 해석이야?'라고 묻는 것 하나, 어떤 감정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넌 누구구나. 그래, 우리 잠깐 같이 있자'라고 그 감정 속에 그냥 머무는 것 하나. 이렇게 별 것 아닌 것들이 그 순간의 나를 아무런 필터 없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그 용기들이 모여 엉뚱한 나도, 허접한 나도, 무서운 나도, 못된 나도, 이상한 나도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담력을 키워줬다. 


방법을 몰라서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언지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방법으로 제시된 다양한 도구들 중 나에게 맞는 도구들을 이용하면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심리 검사가 있는가? 심리상담, 사주, 컬러 세러피, 아로마세러피 등등등 얼마나 많은 도구들이 있는가?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어떤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모습이어도 회피하지 않고 그것도 나라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을 뿐.


물의 거울을 들여다본 사람은, 물론 먼저 자기 자신의 상을 본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자는 자신과의 만남을 무릅쓰게 된다. 거울은 아첨하지 않고 그 안에 보이는 것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즉 연극배우의 가면인 페르소나 Persona로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결코 세상에 내보이지 않았던 그 얼굴을 충실하게 내보인다. 거울은 가면 뒤에 있으며, 진정한 얼굴을 보여준다.
이것은 내면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첫 번째 담력 시험이다.

C. G. 융, <원형과 무의식> 중에서


어렸을 때 무서우면서도 기어코 들어가던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이 생각난다. 당신은 지금 귀신의 집에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귀신의 집 앞에 선 듯 두려운 나에게 파인의 향기가 용기를 보태준다.

"자신에게 솔직해질 용기가 없으니 모든 시간을 타인에게 써버리지. 그 사람들의 말이 진짜 너는 아니잖아. 용기를 내서 들어가 보자. 사실 여긴 귀신의 집이 아니잖아. 바로 너의 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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