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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당신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다

세 가지 사연을 담다

by 능수버들

사진을 보며


남편을 간병하면서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들은 아들과 함께한 열흘 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내가 찍었기에 주인공은 아들과 남편이다. 아들이 아빠 다리를 주물러 주고, 손발톱을 깎아 주고, 면도할 때 거울을 비춰 주는 모습, 휠체어로 함께 이동하는 장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느 날 남편이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이 오래도록 바라더니,

“아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네.”

라며 짧지만 굵은 한마디를 한다. 만감이 교차했는지 다음 말을 잇지 못한 남편의 콧날이 젖어든다.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바닥에 ‘툭’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리 없지만) 나이 들어 여성 호르몬이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아픈 이후로 눈물이 더 잦아진 남편.


브런치에 남편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건, 남편에게 글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말보다 글이 더 깊이 와닿을 거라 믿었다. 병원 생활이 담긴 사진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글로도 그 감정을 전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남편을 소재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선택은 옳았던 것 같다. 남편은 글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다짐을 하곤 했다. 가족들을 더는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사실은 글을 통해서 가을날 시골 마당에 널린 수확물처럼 내가 얻은 게 더 많다. 조금 더 넓게 보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선이 시나브로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7장 <마침내 두 발로 서다>를 브런치에 올린 뒤, 남편에게 링크를 걸어 주었다.

“너무 쉽게, 저절로 걸은 것처럼 표현된 거 아니야? 사력을 다했는데…”

라며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아들과 함께 고생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남은 글도 꼼꼼히 읽은 뒤, 콧물을 흘리며

“고맙다.”

라는 말을 거듭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기 전에도, 글을 읽지 않았을 때에도 남편은 늘 가족에게 마음을 표현하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긴급 출동과 깜짝 선물


퇴원 후 달포 정도 지난 5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해 세 시간 정도 일하고 10시쯤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남편이 없었다. 거실에 있는 소파는 텅 비어있고 시계 초침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창문을 스치는 봄바람이 커튼을 건드리며 살짝 비비는 미세한 소리도 들리는데 남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쓰러진 이후 혼자 외출한 적이 없던 터라, 두려움 밀려왔다. 전화기마저 꺼져 있어 걱정은 더 커졌다. 작은 일에도 큰일로 받아들이는 내 성격 탓에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헤맸다. 그날 이후, ‘남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나는 전적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남편은 퇴원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혼란스러워했고, 전날 밤엔 '죽고 싶다'는 말까지 했었다. 혹시나 해서 남편의 친구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통화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갈 만한 곳을 아무리 떠올려 봐도 짐작이 가는 데가 없었다. 고심 끝에 결국 112에 '실종 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119 대원과 경찰이 싱그러운 바람을 가르며 순식간에 도착했다. 당진에서 일하고 있던 아들도 급히 돌아오는 중이었다.

“가실 만한 곳이 있나요?”

경찰이 물었다.
입술이 바짝 마른 나는 겨우 답했다.
“걸음이 불편해 혼자 외출한 적이 없어요. 요즘 우울해하면서… 죽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경찰과 대원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바뀌었다. 일단 우리는 집 근처를 나눠서 수색하기로 하고 차량에 오르려던 순간, 내 휴대폰 벨이 울렸다. 수신자는 남편.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웠고, 나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였다.


여러 차례 전화가 와 있어 남편은 급히 전화했노라고 했다. 지금 어디냐고 내가 물으니


전화기가 꺼져 있는 걸 몰랐어.
지금 금은방에 있어.

왜 거기를 간 거예요?

선물 사러 왔지!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평온했고, 그 순간 긴장이 풀리며 내 몸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모두 마주 보며 달콤한 미소로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선물 살 거였음 나랑 같이 갔어야지. 그 몸으로 어떻게 거기까지(집에서 남편 걸음으로 족히 1시간가량 걸리는 거리) 갔느냐 하니 깜짝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한다. 선물은 자물쇠 펜던트가 달린 묵직한 18K 목걸이였다. 아이들은 목걸이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를 감금하려는 아빠의 마음인 거지요?”

라는 익살스러운 말에도 남편은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분노를 이해로 승화시킨 부자


《당신의 분노에는 이유가 있다》에서 충페이충은 “사람은 분노하면 순간적으로 사고 능력을 잃는다. 하지만 그 분노가 실패만을 낳는 건 아니다. 때로는 더 좋은 가능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여름, 찜통더위를 피해 남편과 아들이 에어컨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말들이 점점 날카로워지며 공기마저 뜨거워졌다. 식탁 위에 컵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숨소리가 거칠게 엇갈렸다.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던 대화는 어느새 말싸움으로 번졌다. 들불처럼 일어난 두 사람의 감정이 격해졌다. 분노 조절이 어려운 남편은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췄고, 막말이 터져 나왔다. 물건을 던지고 싶은 충동도 강해 보였지만, 남편은 간신히 참아내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들도 그 모습을 보며 쌓였던 감정이 폭발했다. 임계점에 도달한 아들의 분노도 불길처럼 치솟았지만, 더 이상 감정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아들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며 남긴 ‘쾅’ 소리가 여름 공기를 단칼에 잘라냈다. 남편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에어컨 바람 속에서도 땀을 뚝뚝 떨궈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사시나무 떨 듯이 떨며 우두망찰 서 있었다. 아들이 박차고 나갔던 현관문을 넋이 나간 채 노려보고 있었다. 비참함 속에 주먹을 불끈 쥐고 바위처럼 굳어 있던 남편은 ‘내 몸이 이러니, 아들도 나를 무시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을 터였다. 남편한테 무슨 말인가를 해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빠가 참아야지 별수 있겠냐고도 못하겠고, 아들이 나쁜 놈이라고 아들을 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이 언쟁이 붙었으니 둘이 풀어야지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될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그때, 별안간 정적을 찢듯 문이 쾅하고 열렸다. 바깥의 뜨거운 공기가 훅 하고 밀려 들어왔다.


아들이었다. 거센 감정의 소용돌이가 아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아, 격하게 한바탕 붙으려나 싶었던 찰나, 아들이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말보다 먼저 와락 끌어안고, 격앙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아빠, 죄송해요. 제가 아빠를 정상인으로 착각했어요. 보호해야 할 제가 아빠를 힘들게 했어요.”

남편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못했다. 아들 품에 안겨,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채 한참을 그렇게 서서 부자는 몸으로 화해를 했다. 아들의 말과 포옹은, 오해와 자책 속에 웅크려 있던 남편의 마음을 충분히 녹여내고도 남았다.


다음 날, 아들이 출근한 뒤 남편이 내게 말했다.

“못난 아비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당신이 아들 잘 키워 놨네.”

아들의 행동은 남편에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큰 울림을 주었다. 그 울림은, 당신의 아버지와 나누지 못했던 화해를 대신하는 격이기도 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에게 마음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자식에게 다가가는 법도, 품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아들은 달랐다. 아빠한테 먼저 다가왔고, 아빠를 먼저 껴안았다. 그날 부자가 분노를 터트린 것은 서로를 더 이해하고 한발 더 다가가게 만든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오늘, 아들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아빠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리클라이너 좌석이 있는 영화관을 골랐다면서. 한때 서로에게 날 선 말만 주고받던 부자였다. 그러나 뜨거웠던 여름의 분노를 지나, 이해와 사랑이 서서히 익어가고 있다. 오늘 밤, 그들은 영화를 보고 이야기할 것이다. 서로의 견해가 다를 수 있음을 조심스레 인정하며, 어쩌면 밤이 깊도록 대화를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 편의 영화가, 다시 이어진 부자의 밤을 환하게 비춰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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