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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Sep 23. 2021

완벽한 타인을 위한 레퀴엠

완벽한 타인


한 남자의 영혼을 만나는 길

오늘은 내가 아닌 타인의 음성을 빌어 

그에게 가고자 한다


그와 나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고 

일생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는 나와 완벽한 타인이다

그러나 오늘, 이밤에

그를 알지 못하는 나와

내가 알지 못하는 그가 

레퀴엠으로 만난다


그를 사랑하여 함께 살고 아이를 낳았던 그녀는 병으로 누웠고

그의 피를 이어받은 딸은 그녀를 간병하느라 지쳤다

그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듯 닮은 아들은 고단한 삶으로 술에 젖었고

그의 아들이 낳은 또 다른 아들은 사업으로 바쁘다

그가 사랑하고 생산한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는 것 보다 더 급한 것들에 둘러 쌓였다

하여, 그를 한번도 불러보지 못했고 만져보지 못했던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고자 한다


그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차 있는 성당에서

그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그를 위한 레퀴엠이 흘러간다

그가 알지 못하는 이의 손으로 촛불이 켜지고 

그를 알지 못하는 내 눈에선 눈물이 난다


그가 죽도록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제 자리에 있으며 

그가 사랑하던 사람을 사랑하는 내가 이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렇게 일년에 두어번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이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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