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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08. 2021

아일랜드에서 사모님 모시기

아일랜드에서 사모님 모시기

아침 6시면 일어나 식사 준비와 함께 부지런히 씻고 찍어 발랐다. 평상복처럼 보이지만 외출할 때 입는 깔끔한 옷으로 갖춰 입고 아이들을 등교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부형들과 조금씩 안면을 트자 한 학부형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써니, 너는 참 부지런한 거 같아. 어떻게 아침마다 파티에 가는 사람처럼 그렇게 꾸밀 수 있니? 한참 산만한 아이들을 등교시키면서 말야. 정말이지 볼 때마다 놀라워.”

순간 나는 이것이 칭찬인지 조롱인지 헛갈렸다. 그중 가깝게 지내던 메리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애니한테는 신경 쓰지 말라고 속삭였다. 애니는 샘이 많아 남이 튀는 꼴을 못 본다면서……. 나는 내가 유색인종인데다, 작은 시골마을에 몇 안 되는 한국인의 위상을 떨어뜨릴까 염려스러워서 귀찮아도 열심히 갖춰 입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런 내가 넘치게 보였나 보다.

며칠 후, 애니는 내게 다른 한국인 친구들도 궁금하다면서 언제 한번 같이 모임이 나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실 한국인 엄마들은 모두 남편과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들의 가족이라, 사무적이고 가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처지로 친구가 되기 어려웠다. 마치 본 얼굴을 화장으로 가리듯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사이였다. 더구나 주재원으로 나온 남편들의 직급이 모두 달라서 가족들에게까지 보이지 않는 서열이 존재했다. 누구를 데려가나? 안 데려가면 인격에 결함이 있어 친구 하나 없다고 여기거나, 한국인끼리는 서로 헐뜯고 질투하는 사이라고 오해할 테니 이를 어쩌나?

마침 한국인 엄마들끼리 모임이 있어서, 아이리쉬 친구들이 다른 한국인 엄마들을 궁금해 한다고 전했다. 그러자 법인장 사모님께서 당신도 여기 엄마들이 궁금하다면서, 당장 다음 주 모임에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십여 명이나 되는 주재원 엄마들 중에서 하필이면 가장 연장자이면서 대빵인 분이 가겠다니 솔직히 난감했다.

하지만 속 모르는 아이리쉬 친구들은 흥분해서 그 친구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아뿔싸! 벌써 알고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 채 살았다. 그러고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지? 내가 그녀의 이름을 모르네.”

아이리쉬 친구들은 어리둥절해서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 어떻게 친구 이름을 모를 수가 있지?”

“응, 사실 나는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불러. 남편의 보스 부인이라서 마담!”

“정말? 그럼 우리도 마담이라고 불러야겠네. 우리는 너하고 친구니까, 서열도 너랑 같다고 봐야겠지?”

친구들은 나 외의 한국인은 처음 만나는 거니까 더욱 매너 있게 대해 주자며 결의를 다졌다.

“그러면, 너희 마담께서는 너를 뭐라고 부르니?”

잘못 말하면 왠지 내가 미개사회에서 온 것같이 보일까 봐 최대한 멋있게 포장이 하고 싶어졌다.

“그녀는 나를 Leo's Mother라고 불러. 우린 남편의 사회적 관계로 맺어져서 서로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거든. 게다가 서로 존댓말을 쓰기 때문에 이름을 부르면 자칫 낮춰 부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서 그래."

그러자 또 묻는다.

“그럼 아이들이 없는 여자는 어떻게 해?”

그렇다. 우리는 결혼하는 순간 누구의 아내, 어느 집 며느리, 누구의 엄마로 불린다. 심지어는 아파트 호수로 불려지기도 한다. 105호 엄마, 803호 엄마 따위로. 아이가 없으면 대체로 신혼이라서 ‘새댁’으로 불린다. 그런데 새댁은 영어로 어떻게 말한담. 나는 또 머리를 굴려야 했다.

모임에 나가면서 이렇게 긴장하기는 처음이다. 혹시나 사모님이 실수를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내가 너무 비굴해 보일까봐 신경 쓰이기도 했다. 사모님이 현관에 들어섬과 동시에 나는 벌떡 일어나 마중을 나갔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로 안내해 의자를 빼주었다. 아이리쉬 친구들은 한국문화를 모르니까 대충 써니를 따라하자고 자기들끼리 약속을 했다고 들었다. 내가 허리 숙여 인사를 하니 다른 친구들도 차례차례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이어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동시에 누구 엄마라고 소개했다. 이파 엄마, 에밀리 엄마, 데니 엄마 등등.

그중에 마리나는 아이를 13명이나 출산해서 나이도 있고 비만 체형이라 거동이 불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사모님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다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졌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간신히 붙잡아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다시 자리에 앉히면서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마리나는 사모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내가 허리 숙여 인사해 본 적이 없다보니 내 몸이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이렇게 되었네요. 미안해요. 대신 우리 스타일로 할게요. 보통 성당에 가면 정면에 있는 십자가를 향해 하는 인사법인데 우리에겐 최고의 존경과 예우를 다하는 인사법이에요.” 하며 무릎을 살짝 굽히고 마치 발레리나가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날 모임 시간 내내 사모님과 아이리쉬 친구들의 의사소통을 돕느라 나는 진땀을 흘렸다.

내가 커피를 타서 사모님에게 먼저 주고, 비스킷도 챙겨주고, 화장실이 어디인지 직접 가서 안내하는 모습이 아이리쉬 친구들에게는 마치 어린아이 대하듯 느껴졌던 모양이다. 똑같은 어른인데 왜 그렇게까지 보살펴주는지 알 수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리쉬 친구들에게 극도의 예의를 차리느라 그랬다고 설명하는 것도 어쩐지 궁색했다. 나의 이런 행동이 오히려 사모님을 어른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 같고, 심지어 그녀를 폄훼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는 사모님의 태도 역시 그들은 못마땅한 눈치였다.

저들이 혹시 한국식 카스트 제도를 연상하는 건 아닐까? 평소에 자연스럽던 것들이 모두 모순덩어리로 변했고, 앞으로 서로 다른 문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다음 모임에서 만나면 아이리쉬 친구들은 나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마담한테 어쩌면 그렇게 수족처럼 잘해줘.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그 마담 어디 모자란 사람인 거야? 이렇게 묻는다면 정말 앗 뜨거다. 남의 나라에서 내 나라 방식으로 사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뜨거운 맛을 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나는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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