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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Oct 09. 2021

쓸모없는 것들 모으기

쓸모없는 것들 모으기 


처음 이민 왔을 때 우리 동네에는 한국인 가정이 열 집 넘게 있었는데 십여 명의 주부들 중에서 아이리시 모임에 나가거나 학교에 다니거나 또는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러 다니느라 바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골프를 치러 다니느라 바빴고 그릇을 모으느라 경쟁했다. 다른 말로하면 내가 가장 살림을 등한시하는 사람이었고 매일 비행소녀처럼 쏴 돌아 댕기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공구 상에서 물건을 보면서 영어사전을 찾고 있었다.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나는 평소 잘 안가는 상점에 들러 물건을 구경하고 어느 용도로 사용하는지 점원에게 물어보곤 하였다. 때때로 처음 보는 물건인데 나에게 딱 필요한 것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핫 워터 버틀 같은 것이다. 고무 물통에 따듯한 물을 넣어 추운 날 끌어 앉고 자면 아침까지 따듯하게 잘 수 있다. 또한 이런 낯선 곳에선 늘 새로운 언어를 발견한다는 장점이 있다. 

 
그날도 공구 상에서 신기한 기구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한국인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리오엄마 그 영어 다 배워서 뭐할라고? 써먹을라고? 나 참, 돌아서면 다 잊어먹어. 쓸데없는 일 그만하고 그럴 시간 있으면 골프라도 배워요" 그러면서 지나갔다.  

 
그 아주머니는 당시 아일랜드에 5년째 살고 있었고 나보다 열 살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어 두 마리를 사면서 '살먼 투'라고 말하는 정도의 영어실력을 지닌 분이었다. 최소한 5년후에도 내가 아일랜드에 살고 있다면 저 아주머니처럼 살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삼겹살을 주문하면서 '피그'를 달라고 한다던가, 로스엔젤레스에만 한국인이 많지, LA에도 많은지는 몰랐다는 어이없는 말을 하는 외국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물건에 하자가 있어서 환불을 요구할 때 중고등학교 다니는 자녀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를 대동해서 따지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내가 당한 부당함은 내 스스로 따지고 묻고 해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동시에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교양 있는지도 배워나갔다.  


조금 더 성장한 나는 그런 비난 앞에서 화 내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요, 쓸데없는 것도 쌓이면 쓸모 있을 수도 있거든요."하고 말았다. 친구 캐트린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휘말리지 말라는 말을 종종하곤 했다. 타인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든 나만 아니면 된다 뜻이다. 이런 순간 기분이 상한다면 상대의 작전에 말리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영장에서 우린 또 마주쳤다. 수영장에는 남녀 혼용으로 사용하는 개방형 저쿠지가 함께 있었다. 그녀와 내가 저쿠지에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거품으로 마사지를 하며 반신욕을 하는 중이었다. 그 날도 그녀는 어김없이 비아냥거렸다. "리오엄마, 이런데서 한국인 만나도 영어로 말할거야? 한국 사람이 영어로 말해봐야 발음이 다 틀려서 여기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도 못하더구만 뭘 그렇게 애를 써" 그녀의 입술은 웃음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혀는 쯧쯧하며 조롱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 한 연세 지긋한 아이리쉬 할아버지가 탕에 들어오셨다. 할아버지는 나와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였고 좀 멋쩍은지 저녁노을이 모처럼 예쁘다면서 이런 날은 산책을 해야 되는데 이렇게 실내 수영장을 왔노라고 농담을 했다. 산책을 가면 비가 오고, 수영장에 오면 날이 맑고 그렇다며 오는 길에 노을을 봤냐고 물었다. 그녀는 못들은 척 하며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대화를 차단하는 자세였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나는 얼른 '역시 노을은 바닷가에서 봐야 최고인데 바다로 수영 갈 걸 수영장으로 잘 못 온 것 같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해변 중에서도 노을 보는 데는 로세쓰포인트 해변이 압권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익혀도 쓸모없을 것 같은 것들을 몇 개월 모았더니 그 정도의 말은 할 수 있을 만큼의 단어들이 모아졌다.  


살면서 경험하고 배우는 것들 중에서 쓸모없는 것들이란 없다. 단지 쓸모 있는 때가 언제인지 모를 뿐이다. 심지어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조차 하지 말았으면 싶겠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엔 약이 되고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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