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사랑 프랑스! 끝을 맺으며
핸드폰을 보니 프랑스에 온 지 오늘이 888일째다. 그리고 귀국날이다. 아침까지는 흐리더니 오후부터 파리에 최근 보기 드문 많은 비가 내린다. 무더웠던 프랑스 남부의 날씨가 무색할 정도다. 나를 감싸는 모든 것이 스산했고 한산했다. 환절기에 코로나까지 겹쳤다. 가을은 그렇게 다가왔고 나는 그 가을을 떠난다. 그때의 기분이 어땠냐고 나에게 물어본다면 지금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프랑스의 모든 것이 행복했고 아쉽지 않았어요. 마치 잠들기 전에 나의 하루 중 어떤 것도 걸리는 것 없이 편안하게 깊은 잠에 들 수 있을 것처럼"
프랑스 남부 8월을 날씨는 매우 무더웠고 구름은 땅과 가까웠다. 바람에 찢긴 구름은 천천히 대지 위를 달리며 그림자를 부드럽게 드리우고 있었다. 더 이상 유학생의 신분이 아닌 여행객으로서 프랑스 남부의 한 달 살기는 유학생들이나 어느 누군가의 버킷리스트 일수 있다. 그곳의 시간은 나에게 많은 감정을 안겨주었다. 그 많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 일부러 한 달의 시간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남부의 한 달 살기는 훌륭했다. 그리고 설령 그러지 않더라도 태어나서 처음 살아본 타지에서 2년이 넘게 살았으면 떠날 때 많은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쉬운 마음에 이별을 즐겼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 회피였는지 정확하지 않다. 어쨌든 참 다행인 것은 코로나를 포함한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시기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것. 그리고 제과제빵을 처음 시작했던 그때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프랑스를 여전히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지내면서도 억지로 사는 것처럼 불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한국인들이 많다. 참 다행이다.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낸 행운을 누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를 가더라도 그 추억을 평생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네. 그건 파리라는 도시가 머릿속에서 담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축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 Ernest Hemingway(1950)
사랑하고 익숙한 것은 날 아프게 한다
한 달 정도는 최선을 다해서 불규칙적으로 생활했다. 2년 5개월 동안 열심히 살았던 나를 위한 작은 보상이라고 해두자. 8월은, 자고 싶은 욕망과 이른 새벽의 피로, 그리고 적막과 싸우는 것을 즐겼다. 모든 것이 평온했지만 걱정을 만들어 갔고 멈추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수정하는 것을 반복했다. 몸은 프랑스에 있지만 모든 감정은 하루에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갔다. 걱정과 계획을 확실히 하고 유별나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기왕이면 어설프게 하는 것은 딱 질색이다. 예를 들어 상대는 조금 괴롭겠지만 이미 약속된 것들도 두세 번씩 확인을 해야 하고 몇 주 전에 잡는 약속은 반드시 시간 장소를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겠지만 가능하면 약속 장소나 미팅 장소에 약속 전에 미리 다녀오고 늦어도 한 시간은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지인의 소개로 오픈 하는 제과점 관리자 직급 제안이 들어왔고 나는 사업 계획서를 요구했다. 시차를 고려하며 메일을 통해 서로 필요한 부분을 찾고 귀국 후 일정을 잡기로 하고 마무리되었다. 한국의 일정을 쉼 없이 빠르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변동 가능한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이후 더 많은 회사에 지원했다. 지원은 내 자유고 나를 선택하는 것은 회사의 자유지만, 그 회사의 선택을 받아주는 것은 면접자로써의 내 권리다. 삶에서 얻어진 이러한 관념들과 습관이 점철되어 이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장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겠지만 익숙하고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어쩌면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본다. 나에게 익숙한 것들에 조금씩 거리를 두는 연습도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그게 무엇이든지. 지나고 보니 내가 그렇게 끌고 안고 지키려고 했던 것들이 정신 차리고 보니 형편없고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어떤 선택에도 늘 아픔은 오고, 행복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지만 그래도 미리 최소화해서 나쁠 것은 없다. 마음 정리, 관계 정리, 주변 정리 개념이다. 장거리 여행 전에는 내 스스로가 늘 가벼워야 한다.
자연스러움, 그 안에서 답을 찾다
7일 동안 있었던 니스의 빛줄기는 매일 아침 발코니를 뛰어넘어 방안의 모든 것을 휘감았다. 그리고 호텔 들어오는 길목에 일반 성인 남자 키 2.5배 정도 되는 무화과나무가 있다.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무화과 굵어지는 소리와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무화과 냄새가 마치 몸에 배였으면 하는 달달한 냄새가 퍼져 나온다. 자연이 주는 냄새에 매일 같이 흠뻑 취했다. 예전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향수의 냄새가 고급스럽고 좋았다. 이제는 젖은 바람 냄새, 살 냄새, 바다 냄새, 돌 냄새, 과일들이 무르익으면서 나는 달콤한 냄새와 같은 것에 더 애착이 간다. 프랑스에서 제대로 제과를 처음 접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다가오는 단어는 "자연스러움"이었다. 나는 물론 현란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마치 시골에서 직접 키운 유기농 채소에 별다른 양념 없이 무심코 넣은 재래식 고추장 한 스푼 넣고 비벼낸 비빔밥 같은 디저트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과일보다 더 과일 같은 색을 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색소를 넣고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전체의 맛에 균형을 해치는 장식물이 올려진 디저트를 볼 때면 표정 관리가 쉽지 않다. 내 디저트를 향한 본질도,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결국은 돌고 돌아 "자연스러움"에서 답을 찾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자연에서 나오는 근본이 중요하며 사람들이 흔히 답답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면 자연으로 향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프랑스의 마지막 밤
니스에서 출발한 기차는 한 번도 쉬지 않고 6시간을 넘게 달리고 나서야 승객들을 파리의 역에 토해냈다. 밤늦은 시간 파리 기차역 곳곳은 도착한 사람들과 마중 나온 사람들과 승용차, 차들로 가득 찼다. 역과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았던 것은 잘한 일이었다. 프랑스 남부에 있을 때 페랑디 친구들이 나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다. 그리고 우리의 모임을 위해 채팅방이 하나 만들어지고 7명이 초대되었다. 파리나 파리 근교에 살아 1시간 이내로 올 수 있는 친구들로 구성된 방이었다. 하나타, 엘로디, 엠마, 줄, 시리엘, 그리고 한 번도 소개한 적 없는 금발머리의 트리스텅이다. 안타깝게도 그와 시리엘은 타지에서 바캉스 중이라고 참석이 어렵다고 답장이 왔다.
귀국 하루 전날, 프랑스 파리의 코로나 확진자 수, 여행으로 심하게 지친 피로와 햇빛에 빨갛게 타버린 피부 등을 고려하면 약속 장소에 나가는게 현명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삶의 깊숙한 곳으로 돌아간 친구들이 나를 위해 온전하게 저녁 시간을 내어 준다는 자체로 난 감동이었고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임을 아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녁 7시에 엠마가 미리 예약해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이며 우리는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수많은 대화가 오갔고 우려와 다르게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지 않았다. 엠마의 큰 눈은 마치 물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젖어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뒤늦게 나온 고깃덩어리를 썰어서 건네줄 때 나는 그녀의 눈을 봤다. 분위기, 그리고 음식과 와인 그리고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준 친구들, 깨끗해지고 선선한 파리의 저녁 바람까지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그들이 준비한 편지를 써놓은 프랑스 퍼즐과 만년필을 내 자리에 올려놨다. 술기운인지 분위기 때문인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웃음으로 화답했다. 식사도 얻어먹고 선물까지 받았으니 2차는 내가 맥주를 사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새벽 한 시까지 함께 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 그리고 기다리는 가족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아쉬워도 저녁 10시에 분명히 헤어지기로 했는데 말이다.
그날 나는 이상할 만큼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슬픔이 밀려올까 봐 무서울 정도였다. 나를 위해 충분히 많은 시간을 개별적으로 내어준 친구들이 있어서, 내가 떠나는 순간까지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해주고 싶어 하는 그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처음에 그러지 못했지만, 그들은 나를 제과사가 아닌, 외국인이 아닌, 그냥 사람으로 친구로서 날 좋아했다. 삭발해버린 줄이 한국에서 우리 꼭 보자면서 나를 꼭 안아주는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 파리의 달빛 아래에서 모두와 서로 깊은 포옹을 나눴다.
술을 마시지 않은 하타나가 자신의 차로 한사코 사양하는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골목을 빠져나와 센강 근처를 달리다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때 기분?"
"너희들이랑 마지막 함께 해서 좋지. 그리고 후회 없어. 그런데 벌써 그립다. 넌 어때?"
"안 믿겨, 여전히 슬프고... 그래도 우리 진짜 재밌었어"
"... 다시 올게. 언제 올진 모르겠지만"
"1년이 지나도 되고, 3년이 지나도 되고, 10년이 지나도 돼. 다 같이 기다릴게. 한국 가서도 자주 연락해"
"당연하지. 고마워 나도 소식 기다릴게. 그리고 더 좋은 곳으로 이직 축하해"
"파리 야경 좀 더 볼래? 마지막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에펠탑은 시간이 지나 완전히 불이 꺼졌다. 그래도 파리는 어둡지 않았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나를 내려달라고 하고 호텔까지 걸어가고 싶다는 미친 생각을 했다. 파리의 곳곳에 낭만과 추억이 묻어 있다. 불빛은 센강에 반사되어 한 폭의 그림이 되고 몇몇의 연인들은 다리 근처에서 깊은 입맞춤을 나눴다. 내가 2년 전 파리에 처음 왔을 때와 비교해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동경하며 책과 영화에서 상상으로 그려오던 로망의 도시가 내 눈앞에 있다.
나의 프랑스
프랑스를 오기 전에 나에게 그곳은 무작정 '로망의 나라'였다. 서울의 작은 전셋집 벽면에 에펠탑 시트지를 붙여 놓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동료들을 부러워하면 살았다. 유학을 결심했을 때에는 세상은 다 가진 듯이 기뻤고 프랑스 작가와 감독의 작품을 무작정 보면서 가보지 않은 미지의 나라에 동경을 키워나갔다. 이유가 정확히 뭔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내가 제과제빵이 전공이기 때문에 프랑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사랑할때, 이유 없이 좋아하는 감정, 마치 그런 것이다.
나에게 프랑스는 크게는 '인생의 변환점' 작게는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벌거벗은 나를 마주하는 경험'이었다.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어도 사실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고 어쩌면 지금보다 더 경제적으로 부유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이 곳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 쓰는 이 글도 없고 내 생각도 없이 살았을 것이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부재와 삶의 본질의 부재를 경험하면서도 느끼지도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프랑스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나라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프랑스의 진짜 아름다움을 보여줄 준비가 된 나라는 확실하다.
하루에 몇 천명 단위로 코로나 확진자가 생기는 프랑스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꿈과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지금도 꿈을 싣는다. 그들의 불안한 마음과 타지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똑같이는 아니지만 충분히 공감한다. 그들에게 지금 이 시기에 필요한 것은 주변의 동정이나 위로, 걱정보다는 힘찬 응원이다. 그들이 이 어려운 시기에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프랑스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어떤 행보를 걸어왔는지 보다 중요한 것은 첫 출국 비행기 안에서 느낀 그 설렘과 뜨거운 열정을 잊지 않고 돌아오지 않을 그곳의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즐기는가에 있다.
다른 정열, 보다 나은 고상한 정열에 사로 잡히기 위해서 다른 곳에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은 나에게 지금 중요한 숙제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주변의 것들을 치우고 버리며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앞으로 내가 어느 곳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나는 펜을 가까이하고 글을 쓸 것이며, 책과 영화를 가깝게 두고 살아갈 것이다. 예전에는 해보지 못한 독서모임이나 와인 모임 등을 해볼 생각이며, 프랑스어 학원을 등록할 것이다. 가끔 프랑스 친구들이 그리울 때면 내 글에 등장할 것이며 한국으로 돌아온 프랑스를 경험해본 다른 한국인들처럼 프랑스를 미친 듯이 그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프랑스에서 소수의 좋은 인연들을 알고 생각과 시간을 공유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처음 의도와 다르게 이 글을 통해 많은 응원과 댓글과 메시지를 받으며 동기부여와 위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8000km 이상 떨어진 한국에서 항상 노심초사 격려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부모님께 이 글을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주여,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의 차이를 알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루하루 한껏 살아가게 하시고, 순간순간을 한껏 즐기도록 하시며 고난이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 Reinhold Niebuhr(Serenity Prayer) -
가지 같은 시간이란?
이 글은 '가지 같은 시간'의 마지막 글이다. "왜 제목이 가지 같은 시간이에요?", "먹는 가지 맞아요?", "오타인데 계속 제목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등등 질문을 받을 때마다 왜 이 제목을 사용하는지 마지막 글에 공개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의 궁금증을 키웠고 한편으로 질문을 받을때마다 마치 거대한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바로 설명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담이 커져갔다.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제목을 정할 때쯤이었다. 자주 연락하는 한국에 있는 작가 동생은 나에게 종종 "재밌는 일 없어?" 하며 우리 대화의 첫 문을 열었다. 내 주변에서 유난히 재밌고 남들에게 잘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이유다. 그래서 나에게 "가지가지한다"라고 이야기했다. <83과 4분의 1세 헨드릭 흐룬의 비밀일기>라는 책의 주인공은 특별한 뉴스가 없는 시기를 '오이 같은 시간'이라고 부르는데, 내 글의 제목은 그것과 반대로 '가지 같은 시간'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재밌는 해석이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작가 동생과 내가 나눈 진짜 가지 같은 이야기들은 이곳에 쓰이지 않았다. 물론 모든 글이 꾸미거나 거짓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에서 내가 무언가를 느꼈거나 다른 사람들과 공감을 가질만한 이야기들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내 스스로 프랑스 생활이 오이 같다고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니 그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는 이제 경험해야 할 일이고, 프랑스의 생활을 회상하거나, 특별한 뉴스가 되며 흥미로운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난 '가지 같은 시간'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사실에 기반하여 거짓없이 나의 많은 감정을 남겼다. 그래서 나는 나의 가지 같은 시간이 너무 특별하고 매 글 쓰는 순간이 진심으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