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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Eyre Jul 18. 2020

가지 같은 시간

하나의 추억을 더 만들어 줘서 고마워



파리를 떠나기 16 ,  주간 흐린 날씨를   반복하더니 무거워진 먹구름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아침부터 빗방울을 연거푸 내뱉는다. ' 하필 오늘이야?' 유난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후유증인지 아침부터 온몸이 무겁고 짜증이 났다. 핸드폰의 시계가 아침 5 30분이 조금 넘은 것을 확인하고 눈을 다시 지그시 감았다. 지난밤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려면 아직  시간가량 남았지만 잠을 깨고 일어나기로 했다. 한밤중에 올라온 SNS 다른 이들의 일상과 인터넷 뉴스를   훑어보고 믹스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그동안 그녀를 위해 준비  작은 선물들이 쇼핑백 안에  있는지 확인했다. 이것저것 내가 준비한 선물들을 받을 그녀를 생각하니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오늘은 엘로디와 조금  다르고 특별한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이제 빗소리는 들리지 않고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비에 젖은 서늘한 바람방으로 들어왔다. 커피는 그냥 나가서  근처에서 마시기로 했다.



그녀의 동네를 가려고 기차를 탈때까지 비가 저렇게 많이 왔다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



사실 엘로디가 나에게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은 2018 겨울 페랑디 수업이 끝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내가 별다른 계획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자고 선뜻 제안했는데 그때는 내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무산이 되었다. 그리고 올해 페랑디에서의 마지막 일주일 수업을 듣다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의 나의 일정을 물어보고  대답에 얼굴이 아이처럼 밝아졌다. 괜찮으면 자신의 동네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고  이후 연락 와서 " 먹는 음식은 뭐야?”,”파리 근교에서 가보고 싶은데 가보지 못한 곳은 있어?"라는 질문을 했다. 그녀가 무언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아이가 없지만 결혼한 친구(여자) 집에 놀러 가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고 하루 종일 단둘이 시간을 보냈을 ,  부족한 언어 때문에 서로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나를 초대하고  기뻐하는 그녀의 얼굴과 나에게 추억을 하나라도  남겨주려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에 미리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 선물 준비


나에게 선물은 받는 사람보다 준비하는 사람이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의 결과물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내 기억 속에서 그녀와 나눈 대화를 모두 끄집어냈다. 그녀를 위한 적합한 선물을 고르기 위한 방법이었고 멀지 않은 대화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페랑디 마지막 수업 한 주 동안 나를 비롯한 친구들에게 차(茶)에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눈빛이 초롱초롱, 마치 즐거운 소풍을 다녀온 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에게 자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같이 점심식사를 할때도 그녀는 내 옆에 앉아 책 속에 있는 "한국의 차"부분을 펼치고 이것저것 설명하고, 질문했던 기억이 났다.



프랑스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차들보다 그녀가 접해보지 못한 한국의 전통차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예쁘게 포장된 어느 정도 품질을 갖춘 한국차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들었다. 지인들에게 묻고 물어 한국의 건강식품과 차를 파는 곳을 알아냈고 그곳에 몇 개 남지 않은 한국차와 생강, 알로에, 유자청을 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한인마트에서 일본 맛차로 만든 찹쌀떡과 과자 몇 가지를 사서 전부 쇼핑백에 담았다. 전부 그녀를 위한 것이었고 최소한의 도리이자 내 작은 표현에 불과했다.



아쉬운대로 이것 저것 챙겨 놓은 그녀를 위한 선물



초대해줘서 고마워



그녀의 동네에 도착한 것은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비는 완전히 멈췄고 아름다운 구름은 아니지만 먹구름은 밀려났다. 그녀의 달콤한 아침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약속 시간까지 역 주변을 몇 바퀴나 맴돌았다. 그녀가 자신의 집주소를 알려주는 문자를 나에게 보냈고 그녀의 집은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파리의 중심부에서 흘러 들어온 센강이 그녀의 동네를 통과해 프랑스 서쪽 바다로 흐른다. 사람 한 명 없는 한적한 거리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쪽을 바라보니 대문 밖으로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 엘로디를 발견했다. 선물을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녀의 정원에 심어진 다양한 과일나무와 허브들, 3층의 집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하나씩 설명해주는 그녀는 내가 학교에서 알던 사람보다 더 따뜻한 사람이었다. 커피를 준비하는 그녀를 기다리며 센강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잘 정리되어 있는 그녀의 거실에 앉아 벽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 속 숲에 시선이 멈췄다. 몽환적으로 그림에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 그녀는 커피를 가지고 오며 오늘의 계획을 나에게 간략적으로 설명했다. 정해진 시간을 일분일초도 헛으로 쓰고 싶지 않다는 각오가 보이는 계획이었다. "내가 일찍 와서 방해해서 미안해"라는 말에 "네가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도 좋아"라고 대답하며 이제 출발하자며 소파에 걸린 그녀의 빨간 가디건을 챙기고 머리에 선글라스를 꽂았다.



한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그녀의 동네


여라기지 과일이 심어진 그녀의 정원, 그리고 거실




오늘이 아니었으면 나누지 못했을 이야기



그녀의 부모님 댁도 자신의 집에서 차로 20분 이내 거리에 있다며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는 들판을 운전하며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나에게 설명해주려고 노력했다. 패키지 여행사 직원 느낌이 들어서 그만하라고 말하려다가 그녀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고 자신의 동네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내가 사랑하는 파리를 그녀는 매우 싫어하는데 대도시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베르니라는 관광지까지 이동하면서 내 관심 있어하는 곳, 그녀가 계획한 곳에 몇 번이고 내려서 강가를 걸으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들려줬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와 나의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녀의 발걸음이 얼마나 빠른지 중간중간에 내가 천천히 걸어달라고 몇 번을 요구하느라 대화가 끊기긴 했으나 서로 대화가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베르니 모네의 집에서



그녀는 한국 나이로 나보다 한살이  많다. 그리고 일주일에 3번씩 유도를 하고 청소와 정리정돈에 대해 주방에서 경험한  이상으로 세심하게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을 그녀의 자동차와 집에서 느낄  있었다. 식용꽃과 차에 대해 관심이 유난히 많으며,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에 프랑스  지역에서  좋은 원재료를 받아 가공하여 제과점이나 홈베이킹을 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유통업체 일을 이미 작게 시작했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던 그녀가 내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오고 싶어 하며 한국의 문화와 음식, 그리고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는데 오늘이 아니면 나누기 힘들었을 대화들이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을 피해 다니던 나는 사라졌다. 그녀만 괜찮다면 하루 종일 조수석에 앉아 해바라기와 옥수수 밭을 보면서 그녀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문적인 꽃 명칭이나, 자신의 동네에 얽힌 역사적 사건들을 이야기해줄 때 구글을 사용했던 것 빼고는 걱정했던 것보다 대화에 큰 문제는 없었다.



돈과 꿈 그 사이 어디쯤



지베르니에 들리고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그녀의 차에서 우리는 꿈과, 미래, 서로의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인들은 과거보다 미래 지향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어 면접을 보거나 사람을 알아갈 때 과거의 이야기보다는 미래의 계획이나 꿈에 대해 더 자주 이야기하고 흥미를 가진다. 한국에 돌아가면 계획이 뭔지 무엇인지 능숙하게 운전대를 돌리며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제과점에 들어가서 취업을 하고 몇 년 후에는 내 가게를 차릴 거야"라고 말할 뻔했다. 그녀에게 성의 없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먹어보는 곱창 크페레와 사과주, 아늑한 센강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생각을 다듬어 매우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정확하게 내 가치관과 내가 이곳에서 느낀 감정들을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취업과 한국 일정들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정면을 응시하면서 가끔씩 나를 보고 고객을 끄덕이던지 "Tu as raison(네 말이 맞아)"와 같은 리액션을 해줬다. "거봐, 세상에는 중요한 것이 많아.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것을 꼭 지키며 살길 바래"라고 말하며 자신도 이 학교를 통해 변화된 다신의 생각과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페랑디를 통해 나만 변한 줄 알았는데 우리는 서로 비슷한 것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프랑스인들은 일보다 가족과 개인의 삶이 존중받는 문화라고 말하며 이내 나의 새로운 소식들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내가 조금 더 헌신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생각했는데 '진짜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번복하지 말아야지'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우리는 지금 태어난 나라, 살아온 문화, 다른 언어, 외모를 다 떠나서 서로 존중하는 대화를 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 것, 꿈이 돈을 좇아가는 인생을 살지 말 것'




가슴 아픈 일


모든 일정이 끝나고 작은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이사하기 전에 엘로디가 자주 부모님과 즐겨 찾는 곳이고, 자신의 남편과도 주말에 온다고 했다. 나는 맥주, 그녀는 레모네이드를 앞에 두고 나란히 항구를 바라보고 앉았다. 학교 친구들의 근황과 과거에 내가 놓친 이야기들을 물어봤다. 23명의 친구들 중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부분이 이 직업을 이어가지 못할 친구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짜야? 우리 학교 다닐 때 다 제과에 열정적이었잖아. 새벽마다... 믿을 수 없어. 왜 다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는 거야? 왜 안 하는 거래?"라며 철없는 말을 남기고 남은 맥주를 다 비워냈다.



엘로디 예전 집 근처의 항구 도시, 지금은 관광지다


제과제빵 일을 하면서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제과제빵이라는 직종을 떠났다. 심지어 나보다 경력이 한참 많은 선배들도, 부푼 꿈을 안고 유학에서 돌아온 친구들도, 각자의 사정에 의해 그렇게 떠났다. 내가 붙잡거나 도와줄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때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열정적인 사람들이  빨리 지치는 것인가? 흥미롭게 보이던 일이 현장에서 부딪히니 어렵고 화려하지 않아서? 급여가 많지 않아서? 재능이 없다고 느끼거나 늦게 시작해서 뒤쳐진다고 생각해서? 돈이 안되니까? 그때의 생각들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나와 그들의 공통 관심사가 지구 반대편에서도 이어지길 바랬는데 이제 추억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슬펐다. 그녀도 유감이라고 했다. 항구를 바라보다가 내가 엘로디에게 말했다. "그래도 그들이 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약속



카카오바리라는 프랑스 초콜릿 회사 공장이 그녀 동네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그곳에 들리기로 했다. 그녀는 눈에 렌즈를 껴서 자주 깜박인다고 했지만 피곤해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운전하고 자신이 계획한 대로 움직이며 나와 많은 대화를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저녁 6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이야기와 웃음을 멈추지 않는 그녀가 이제 나를 기차역에 내려주며 이야기했다.



카카오바리 공장과 작은 매장 방문



 "짧은 시간이었는데 네가 만족했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너 아름다운 사람인지 잊지 마. 오늘 나랑 함께 해줘서 고마워 성민. 최고의 하루였어"


"너 덕분에 좋은 추억이 하나 더 생겼어. 추억이 있는 예쁜 마을에 초대해줘서 고마워. 수업시간마다 웃으면서 엄지 올려주고 이리저리 다니며 청소하는 너 모습 잊을 수 없어. 내 눈빛만 봐도 내가 이해했는지 못했는지 알아주던 네가 있어서 든든했어. 그래서 너랑 가장 대화하기가 편했고...."




씩 웃으면 기차 곧 온다며 들어가라던 그녀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라도 더 느끼게 하고 싶어서, 하나라도 더 맛보게 해주고 싶어서 나를 자신의 소중한 곳에 초대해주고 모든 것을 예약하고 계획해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이 글을 통해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녀와 헤어지고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우울한 감정이 지속 됐다. 좋은 사람들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이제 진짜 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 때문에라도 더 보란 듯이 재밌게 살아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내 프랑스 생활의 큰 존재들을 내려놓고 가야 하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지만 나는 이게 끝이 아닐 것을 믿는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린 그날 제과사로 만난 것이 아니고 서로 외국인으로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서로 사람으로, 친구로 만났고 유익하고 서로에게 조금 더 알아갈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눴다. 많은 것을 새롭게 느끼고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추억이 생겼다. 그날 나는 엘로디에서 "잘 지내, 잘 있어"라는 말 대신 " 곧 보자"라고 이야기했다. 다시 만날 것이라고 약속했으니까. 그리고 브런치에 글들을 소개해줬다. 비록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한글말이지만 엮어서 책으로 만들고 싶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책이 만들어지면 그녀에게 제일 먼저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가지 같은 시간은 내 이야기인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니까.


라벤더 잎을 따서 나에게 먹어보라던 엘로디





Tu as été un super collègue de marbre. plus rapide que l'éclair pour faire préparation et toujours très minutieux dans tes réalisations. Merci à toi d'avoir passé cette journée avec moi. J'ai eu beaucoup de plaisir et d'honneur de te faire visiter un petit coin de ma France.

(너는 작업대의 위대한 동료였어. 번개보다 빨리 준비하고 항상 작품에 매우 세심해. 오늘 나와 함께 보내줘서 고마워. 나의 프랑스의 작은 공간에 너를 초대해서 매우 즐거웠고 영광이었어)

 - Elodie Vig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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